내 고향 `이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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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이원리'
  • 보은신문
  • 승인 2007.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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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3학년)
초등학교 때 은사님이시자, 아동문학 작가셨던 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농담 삼아 말씀하셨던 그 말인 즉, 동네 이름이 ‘이원리’가 아니라 ‘십억리’정도 되었으면 굉장한 부자마을이 되었을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작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도 있지만, 약간은 억지스러운 이 말은 내가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으레 떠오르게 되었다.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보은에서 청주로 향하다 보면 서지리, 두평리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첫 번째 동네가 바로 나의 고향 ‘이원리’이다. 지금도 가끔씩 명절이나 제사가 있을 때 이 마을에 들어서게 되면 마음 한 구석이 그야말로 짠해지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느끼는 어떠한 공허함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어나서 중학교시절까지 16년, 고등학교를 청주로 진학하고, 대학교를 서울로 진학하여 어쩔 수 없이 떠나기 전까지 한번도 벗어난 적 없는 나였다. 따라서 유년기의 모든 추억은 항상 마을과 맞닿아 있었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뒤에는 산이 둘러싸고, 앞에는 물이 흐르고, 그 물줄기를 따라 논과 밭이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비록 눈에 띄는 부잣집은 없었지만, 항상 풍요롭고 웃음이 넘치는 온 마을사람들이 그야말로 가족 같은 분위기는 나의 유년시절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고향마을엔 돌담길이 있었다. 어떤 연유로 누가 쌓았는지 모르지만, 마을 중심부에 10여 채의 집을 경계짓는 돌담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 돌담은 기가 막히게 쌓아서 정말 멋스러워 보였다.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인 돌들을 서로 아귀가 맞게 쌓아올린 모습은 탄성을 자애 내었고, 더군다나 반듯하게 쌓아온 것도 아닌, 어느 곳은 배가 블록 나오고, 어느 곳은 푹 꺼진 일종의 파격도 자랑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 돌담길을 따라 걷는 것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돌 틈 사이엔 갖가지의 곤충들과 개구리가 살아있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 중에 나를 가장 놀래 키고, 또한 흥분시킨 것은 도마뱀이었다. 돌담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내 앞을 마치 길 앞잡이 마냥 가로지르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다.

고향마을의 흙 길도 나에겐 크나큰 추억이었다. 시멘트길만 밟고 사는 도시인들이 일부러 흙 길을 밟기 위해 교외로 나간다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온 발바닥으로 구석구석으로 느낄 수 있는 그 감촉은 지금생각하면 참 기분 좋은 것이었다. 비가 오면 마을사람들을 어지간히 골탕먹이는 것도 이 흙 길이었다. 온통 질퍽질퍽해진 흙 길은 발을 푹푹 빠지게 하여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신발과 옷을 한순간에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끔 차들도 진흙탕이 되어버린 흙 길에 갇혀 고생하곤 했는데, 이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비가 오면 항상 누군가가 넓적한 돌을 놓아 길을 만들었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흙 길에 드문드문 놓여있는 돌을 밟고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 긴장감이 온몸에 퍼진다.

시간이 흐르고, 농촌에도 편리의 바람이 불면서, 농촌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돌담을 허물어 부수더니 동네의 모든 흙 길을 평평하게 닦았고, 며칠 후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그리고 돌담이 있던 자리엔 시멘트벽돌로 새롭게 담을 쌓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시간이 흐르고, 회색 빛 일색으로 물든 동네의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에 공허함을 느낀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편리라는 이름으로 그동안의 추억을 모두 앗아가 버린 상황을 이해하기까지는 사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많던 곤충들도, 가끔씩 사람을 놀래 키던 개구리도, 도마뱀도 이젠 없다. 회색의 땅에서는 어느 것도 살 수 없었다. 나는 시골마을에 대한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을 잃어버렸다.

‘시간의 켜’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에 과거를 적절히 보존하여 현대와 매듭짓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런 뜻이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경험일 것이다. 시골마을의 시멘트벽과 시멘트 길에는 과거가 없다. 다만 현재의 편의만 있을 뿐, 한순간의 편리함을 위해 우리가 잃은 것은 너무 큰 것이었다. 이전에 돌담과 흙 길에서 느꼈던 감흥을 앞으로 어디에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고향마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공허함의 이유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들의 유년은 꼭 시골마을에서 보내게 할 꺼야’라는 다짐을 한다. 회색 및 일색의 급박하게 돌아가는 환경보다는, 녹색으로 둘러싸인 여유로운 환경이 몇 십 년 후면 도시 속에서 치열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크나큰 힘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믿음은 지금 내가 그러하기에 더더욱 확고히 굳어진다. 고향마을이 나에게 가져다 준 추억은 추억 이상의 엄청난 힘이고, 지혜이다.

얼마 전 도시의 아이들이 농촌학교로 전학을 오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일기속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은 물질적 풍요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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