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보은에서의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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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보은에서의 추억들
  • 보은신문
  • 승인 2007.11.1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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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상(경희대학교 한의학과 3학년)
고향...고향이란 말은 추억과 연계되는 것 같다. 이러 저러한 일들로 힘들 때, 고향이란 단어 아래 '그땐 그랬는데..'하면서 머리 속에 잠깐의 휴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런 고향이 나 에게도 하나 있다. 보은.

태어나서부터 16살까지는 매일 그곳의 물을 마시고,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그곳의 땅을 밟으며 살았다. 이사라고는 세 번 다녀봤지만 그래봐야 보은에서 보은으로의 이사였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곧 보은 그 자체, 내지는 보은에서의 어릴 적 추억일 수밖에 없다.

난 '거현리'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작은 동네였다. 동네에 친구라고는 두 살 터울인 우리형과 동네 교회 목사님의 딸이 있었다. 매일 멀 하면서 놀았는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여느 어린 애들처럼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멀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게 난다.

봄엔 물고기를 많이 잡으러 다녔던 거 같다. 할머니 집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냇가가 있다. 매일 그 냇가에 갔던 거 같다. 점심 먹으면 형이랑 나랑 반두를 들고 냇가에 갔다. 그렇게 매일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는데 매번 열댓 마리씩은 잡혔던 걸 보니 물고기가 많았나 보다. 그렇게 보면 많이도 잡은 건데 그 물고기들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름엔 잠자리랑 매미를 잡으러 다녔다. 마을회관 맞은 편 풀숲에 잠자리는 참 많았는데, 매미는 드물었다. 이상하게 집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땐 매미 소리가 요란한데 막상 잡으러 나서보면 죄다 어디 가고 없었다.

가을엔 밤을 많이 따러 다녔다. 물고기, 매미, 잠자리는 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밤은 다 구워먹었다. 할아버지가 불장난하지 말라고 매번 뭐라고 하셨는데 말도 참 안 들었던 것 같다.

겨울엔 연을 주로 날렸다. 방패연은 한번도 아 날려보고 가오리연만 날렸던 거 같다. 겨울엔 항상 눈이 덮여있었던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썰매도 많이 타러 다녔다. 썰매를 자주 타는 비탈길이 있었는데 할머니들이 길 미끄러워 진다고 타지 말라고 혼내셨는데,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새삼 죄송하다. 그래도 거기서 누가 넘어져서 다쳤단 소리는 못 들어봤다.

거현에서의 추억은 이렇고 나의 다음 고향은 교사리였다. 처음엔 대림아파트 뒤쪽 언덕 쪽에 산다가, 그린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성아파트로 왔다.

대림아파트 뒤에 살았을 때는 내가 유치원 다니기 전이었으니까 하루 종일 자유였다. 하루종일 놀았으면 뭔가 해도 많이 했을 텐데,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나 기억나는건 형이 자전거를 많이 태워줬었다. 한번은 형이 자전거를 태워서 가다가 넘어져서 손에 끼고 빨아먹던 반지사탕이 깨졌다. 15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기억하는걸 보니 당시 꽤 충격을 받았었나보다.

그린아파트에 살 때 난 유치원이었고 초등학생이 되었다. 어릴 때 나는 혼자 집에 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항상 친구 한 명씩은 꼭 데리고 집에 갔다. 친구랑 집에 가서 막상 하는 것도 없었고, 재미있는 장난감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친구를 잘 꼬셔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거성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서 처음 본 건 우리 집보다 삼년산성이었다. 아파트에서 앞을 딱 보니 삼년산성이 보였다. 소풍갈 때 자주 가곤 했던 곳인데도 막상 매일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또 하나 우리 집에서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 집에서 나오면 바로 보청천이 보인다. 난 지금도 그렇고 어렸을 때도 산보단 물이 좋았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으레 창문 너머로 보청천 징검다리를 보고 있곤 했다. 보은중학교를 다닌 나의 등굣길은 처음엔 그 징검다리였지만, 어느센가부터 동다리를 건너서 가게 되었다. 동다리를 건너고 나서 있는 신호동 옆에는 항상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이런 저런 내용들로 여러 가지가 걸려있었지만 학생이었던 만큼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울대 합격', '○○○ 제○차 사법고시 합격'이었다. 어린 맘에 난 그게 너무 부러웠고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 갈 때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은근 다짐을 했다. '이 다음에 내 이름 있는 현수막 꼭 한번 걸어야지.' 유치하기도 했지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대는 그 이유도 컸다. 결국 대학교 3학년인 지금까지도 현수막을 걸어보겠단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덕분에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공부했던 거 같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거성아파트에 살고 있다. 물론 공부 때문에 지금은 서울에 와 있지만 못 가도 한 달에 한번은 꼭 집에 간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청주를 지나고 미원도 지나고 창리도 지나고 하면 보은이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오다보면 이렇게 여러 곳을 거치게 된다. 행정구역상으론 창리 이전부터 보은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외지에서 보은으로 올 때 '아 이제 보은이구나.'라는 생각을 주는 곳은 '대바위 가든'이다. 멀리서 '대바위 가든'을 보게 되면 '보은 다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창리 이전에 봉황휴게소부터 느낀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렇게 보면 난 감각이 좀 둔한가 보다.

인구도 적고 딱히 내세울 만한 뭐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난 추억 많은 보은이 좋다. 그래도 딱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대학교 오니까 처음 만났을 때 고향을 많이 물곤 한다. '고향이 어디예요?'. '보은이요'. '보은이 어디 있는 거죠?' 대부분 이런 식이다. 사람들이 보은을 높이 평가해주기 바라는 건 아니지만, 보은이라는 곳이 있다는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난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그 속리산 있는...' 그러면 사람들이 웬만큼 알아듣는다. 난 고향을 좋아하니까 우리 고향이 나를 발전했으면 좋겠다. 발전이라는 게 꼭 공장 생기고, 건물 들어서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니 만큼, 일반 사람들 가슴에 보은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으면 좋겠다. 황금곳간쌀이 되었든 황토 사과, 황토배가 되었든 속리산이 되었든 당장 그 상품을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은이라는 이미지와 많이 결부되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보은.. .나에겐 언제나 깨끗하고 맑은 추억으로, 다른 사람들에겐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이미지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2007. 10.
비 오는 아침에 책상 앞에서 고향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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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지혜 2009-01-03 01:52:41
실내 온도를 빨리 올리고 싶다면 가습기를 튼다


외출 후 돌아와서 집이 추울 때 보일러 온도를 무작정 높이지 말고 적당한 온도로 맞춘다.

대신 가습기를 틀어 집에 습기를 더한다.

보일러를 작동시키면 바닥이 덥혀지면서 집이 따뜻해지는데,

습도가 높으면 공기 순환이 빨라져 집이 빨리 데워지는 효과가 있다.

출처:다음카페 생활의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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