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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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 보은신문
  • 승인 2007.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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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유 미(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학과 4학년)
고향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특별하다. 고향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TV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본인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토록, 고향은 우리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넓고 아득한 어머니인 것이다.

우리는 늘 고향의 발전방향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의 고향만큼은 변치 않고 나 어릴 적 그 때 그 모습으로 있어주길 바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대부분 도시, 특히 서울)에서는 신체적 편의를 추구하고, 고향에서는 심리적 안위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이 모순된 기대가 얼마나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가까운지 알게 될 것이다. 숨막힐 정도로 빠른 도시 속에 살면서 고향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이기적인 기대이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는 고향은 어릴 적 많지도 않은, 그렇지만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사람 소리와 사람 흔적을 만들어내며 살던 곳, 그러나 지금 고향에 돌아가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어린 나와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싸웠던 어린 친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언제나 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들 수 있을 만큼 맑을 것 같던 계곡도 잠잠하다. 명절에 부산스레 찾아가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을 반기는 것도 잠시, 우리가 각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면 고향에는 쓸쓸한 흔적들만 요란하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고향’은 ‘시골’과 비슷한 의미로 자리 잡았을까?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고향은 처음부터 ‘시골’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고향’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멈추지 않는 시계처럼, 계속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순간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 인구의 대부분의 살고 있는 도시처럼, 한때 우리의 고향은 서울이었을 테고, 한번쯤은 왁자지껄한 도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향은 그 자체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각자 살고 있는 도시보다 열등하다거나 뒤쳐졌다거나 하는 인식보다는, 세월에 따라 바뀐 삶의 양식이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 그러나 과거에만 정박해있는 땅덩어리가 아닌, 언제든지 현재 나아가 미래로 뛰어들 수 있는 삶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2007년 지금의 우리가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고향이 나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만큼, 우리의 고향도 치열하게 삶의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있다.

나에게 고향이 왜 좋으냐고 물으면, 가식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정리된 도로, 깔끔한 건물, 지하철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 서울이 질릴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흙길에서 신발을 질질 끌다가 돌부리에 걸려 뒤뚱거리고 싶기도 하고, 거미줄 처진 문방구 안에서 신기한 고물 장난감을 찾아내고 싶기도 하고,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막연히 버스를 기다리고 싶기도 하다.

우리가 해바라기라면 고향은 연꽃이다. 해바라기는 오직 태양만을 쫓는다. 태양만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다가 힘없이 꽃잎을 떨군다. 우리 역시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쫓는다. 좋았던 시절, 좋아하는 것을 외면한 체, 빛나는 무언가 우리가 우러르는 무언가(돈이든 명예든 성공이든)만을 쫓는다. 그러나 연꽃은 맑은 물에서든 더러운 물에서든 만개하며 자신이 가야할 때 모든 추함을 감싸고 물 안으로 고즈넉이 가라앉는다. 사람이 북적거릴 때도, 그리고 우리가 외면할 때에도 물 안으로 고즈넉이 가라앉는다. 사람이 북적거릴 때도, 그리고 우리가 외면할 때에도 고향은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가 고향을 찾지 않는다고 해서 고향은 아무런 불평이나 해코지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스스로 한 걸음씩 물러나 주는 것이다. 평생 해바라기처럼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밋밋하지 않은가? 연꽃처럼 지조있게 우리의 곁을 지키는 고향에 애정을 쏟는다면, 우리의 삶은 한층 더 향기로워질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고 ‘술 권하는 사회’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음주애호문화도 대단하지만은 사람들이 ‘발전’운운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발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발전이라는 것이 고향과 고향이 아닌 곳(대체적으로 도시)를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적용했다.

우리는 ‘발전’이라는 단어에 너무 익숙해져있지만, 어찌 보면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우습다. 발전은 이상적인 방향성을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방향이 좋은 것인지를 그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난 우리의 고향들이 한가지 모습의 발전이 아닌, 여러 가지 모습으로 깊이를 더해가길 바란다.  그러나 이는 고향에만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우리와 고향간의 활발한 교류가 필요하며, 그보다 앞서서 우리들의 고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조금씩 고향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고향의 좋은 점 혹은 독특한 점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빛나고 있던 고향의 가치를 몸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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