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 韓流 발자취를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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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韓流 발자취를 찾아서(2)
  • 보은신문
  • 승인 2006.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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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은 수
‘구다라’라는 호칭은 백제의 고어(古語)로 ‘큰 나라’

·시인
·탄부 장암2리 출생
·시집 ‘전봇대가 서다’ 발간

일본 오사카에 우리 일행이 도착한 것은 지난 11월12일이었다. 각계 인사 34명이 나라 등지로 ‘일본속 민족사 학술탐방’에 나섰다. 생각보다 날씨는 포근했다. 도착 하자마자 교토에 있는 일본왕실 사당 ‘히라노신사’ 제1신전(神殿)에 제신(祭神)으로 모신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의 신전참배를 시작으로 학술 탐방단은 일정에 들어갔다. 왠지 낯설지 않는 거리같고 교외로 빠지는 길도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연예인들이 요즘 유럽 중국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류’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스포츠뿐 아이라 영화, TV드라마며 한국노래, 한국어 강습도 한창이다. 특히 일본인들이 백제 문화를 입버릇처럼 찬양하던 “구다라나이(百濟無い)”라는 말이 일본 땅에서 오랜 역사 속에 이어왔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百濟の物では無い)”였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뛰어난 생산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요즘 흔히들 외제 명품을 따지는 것과 같은 찬사였다. 옛날부터 일인들의 ‘백제 칭송’이다. 이렇듯 고대 백제 문화는 왜(倭)나라에 영향이 컸다고 외국어대 홍윤기 박사는 해설한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 오사카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사카(大阪)는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창설 132년의 ‘구다라소학교(大阪市立南百濟小學校·1874년 창립)가 있으며 구다라역(〃驛), 구다라왕신사(〃王神社), 구다라사지(〃寺趾) 등등 백제 자취가 이곳저곳에 뚜렷하다.

어째서 일인들은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게 되었을까. 교도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명예교수는 지난해 자택에서 직접 홍윤기 박사에게 “구다라라는 호칭은 백제의 고어(古語)로 ‘큰 나라’라고 하는 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고대의 미개한 일본을 개발해준 선진국 백제를 ‘구다라’ 즉 ‘큰 나라’로 찬양했다 한다.

백제의 세 번째 왕도인 충남 부여 땅에는 ‘구두레’라고 부르는 큰 마을이 있다. 구두레는 큰 들 또는 큰 나라의 뜻을 가진 백제 고어인 것을 거듭 살피게 한다. 부여의 구두레라는 지명에서 백제를 구다라로 소리 내어 읽는 일본 만요가나(萬葉假名)의 음독(音讀)이 생긴 것 같다고 홍교수는 말한다.

“일본 천황은 밥 먹고 나면 숭늉을 마신다” 말이 언제부터인가 항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조선왕조 말기의 영친왕비(英親王妃)였던 이방자(李方子·나시모토 마사코 1901∼1989) 여사가 생존 당시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 왕실에서도 숭늉을 마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본래 일본 왕실에서 자란 왕족으로 영친왕에게 시집왔으며, 숭늉을 마신다는 것은 그 당시의 히로히토(裕仁·1926∼1989 재위) 일왕을 가리켰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국가원수 최초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던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입니다”라고 만찬회 자리에서 발언했다고 일본의 한 학자(간다 히데카즈·神田秀一 오비린대학 교수)가 밝힌 일이 있다. 물론 히로히토 일왕은 한국인의 핏줄, 구체적으로는 ‘구다라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아키히토(明仁·1989년 즉위) 일왕도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공언했나보다. 그날(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은 도쿄의 왕실에서 68회 생일을 맞으면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처럼 말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501∼523 재위)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 역사책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아사히신문 2001년 12월23일)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재작년 충남 공주에서 거행되었다. 일본 왕실의 왕자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가 아키히토 일왕의 윤허를 받고, 그해 여름(2004년 8월3일) 공주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송산리 제7호 고분)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 그는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고대 일본 왕실의 향을 향로에다 피우며 제삿술과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렸다.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공주시장에게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과 향로를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향은 1300년 된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매우 귀중한 일본왕실 제사용이다.

홍윤기 교수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칠 줄을 몰랐다. 오랫동안 연구한 일본 역사를 현지에서나 버스에서 쉴틈없이 그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 주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이곳에 내용은 대부분 홍교수의 해설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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