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서원 추향제서 종헌관 역할 당당히 수행
조상을 위하고 선현을 위하는데 남자와 여자를 꼭 구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엄격한 유교사상에서는 당연했다. 감히(?) 여자는 조상의 위패 앞에 당당히 서있지 못했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조상을 위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21세기인 지금은 그래도 많이 희석돼 제례 등에서는 여자들도 제주와 함께 나란히 서서 예를 갖추고 있고 종헌은 맏며느리나 맏딸 등 여자들이 맡는 집안도 많다.
그러나 아직 향교 등 유교문화에 의해 제를 지내는 곳에서는 아직 여자가 헌관으로 참여하는 예가 없는데 남녀유별의 사상이 뚜렷한 유교문화, 유림문화에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외속리면 서원리에 소재한 상현서원(원장 정기형)에서 지난 4월에 올린 춘기제향에 이어 10월13일에 올린 추기제향에도 여성을 종헌관으로 참여케한 것이다.
전국 500여 서원 중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사액서원이며 충북에서는 처음으로 창건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상현성원에서 여성 헌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일대혁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종헌관으로 예를 올린 여자는 바로 수년간 상현서원의 원장을 지내며 서원을 중창하는데 앞장섰던 고 이흠수씨의 장녀인 이하영(62, 본명 이영식)시조시인이다.
2005년 가을부터 상현서원의 운영위원으로 등재된 이하영씨는 “여성이 헌관으로 참여했으니 매우 영광스럽고 아무리 양성평등 시대이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됐다고는 하나 완고한 유림문화에서 여성 참여의 문호를 연 것은 대단한 것이며 우리가 아버지 때문에 그런 특권을 누린 것 같다”며 대단히 감사해 했다.
■ 아버지때문에 자식이 빛보다
고 이흠수(93년 작고) 상현서원 원장과 홍복희(80, 외속 장안)씨의 2남3녀중 맏딸인 이하영시인은 아버지가 상현서원 원장을 10년간 재임하며 아버지 개인 재산을 써가며 서원을 개보수하고 기금을 마련하는 등 상현서원에 애착을 가졌다고 말했다.
상현서원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자식들은 자부한다고 말했다.
공직 퇴직 후 상현서원 복원 및 유지관리에 평생을 받친 아버지를 살아서 만난 것 같았다”는 감회를 밝혔다.
이하영 시인은 그러면서 오랫동안 상현서원의 원장을 지내고 성균관 전학에다 보은 노인대학교장을 지낸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것도 자식으로써 기쁘다고 말했다.
봄과 가을 제향을 지낼 때마다 되도록 이면 참여해 예를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 운영위원으로 돼 있는 자신과 여동생(이정식씨)이 참석하지 못하면 남동생들이라도 참여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도록 할 계획이고 남동생들도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상현서원 교육의 장 돼야
그러면서 현재 유림 몇몇만 모여서 제를 올리고 있는데 상현서원을 후세의 교육의 장으로 해야 한다며 제를 올릴 때에도 청소년들이 참여해 위인들의 업적 및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상현서원에는 충암 김 정 선생과 대곡 성 운 선생, 동주 성제원 선생, 중봉 조 헌 선생, 우암 송시열 선생까지 5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모두 학문이나 성품, 선비정신 등으로 볼 때 역사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들로 그분들의 정신을 전파해야 하는데 묻혀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생전에 아버지는 늘 자기 이익에 치중하기보다는 정의를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을 계승,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상현서원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예를 올리며 상현서원에 모셔진 선현들의 사상과 학문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고. 조선조 대학자였던 충암 선생이 보은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마음 아파했다.
또한 상현서원을 비롯해 하개리 99칸 고택, 동학 취회지, 마로 관기 고봉정사, 탄부 하장 익재영당 등을 묶어 패키지 관광상품으로도 충분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익재영당의 경우 고려말 최고의 시인인 익재 이재현의 영정을 모신 사당치고는 너무 초라하다며 중창을 건의했다.
99칸 고택의 경우도 후문으로 들어가 행랑채부터 보게해서는 안되고 하천에 다리를 놓더라도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옛날 모습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하영 시인은 상현서원 추향제에 참석하고 문화유적 및 역사인물 등을 발췌해 하나의 관광테마로 잡고 패키지로 묶어 관광상품화 할 필요가 있다고 지역의 문화유적지를 돌며 느낀 감회를 이렇게 쏟아놓았다.
그의 이같은 바램은 모두 고향 보은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좋은 곳, 가장 아름다운 고장으로 거듭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 당당한 여성상 보여줘
교육자였던 아버지 때문에 입학은 산외초등학교에서 하고 2학년은 삼가초등학교에서 보내고 4학년 때 종곡초등학교로 왔다가 삼승초등학교에서 졸업해 보은중학교를 나왔다.
여러 문학도서를 읽고 틈틈이 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배운 것은 물론 풍금도 배웠을 정도로 다방면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
각종 백일장에서 상을 맡아놓았을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던 소녀 이하영은 그렇게 지식과 교양을 쌓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새마을 운동본부였던 촉진회 간사로 참여해 교육을 받은 후 중학교를 가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외속 고등공민학교에서 가정선생님으로 활동했다.
교실이 없어 학생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어서 교실을 만들기도 했고 교실이 모자랄 정도로 학생들이 늘어나 면사무소와 개안리(지금의 하개리)마을회관, 교회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개안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장안 집으로 돌아가면서 장안 하천 자갈 사이에 꽃분홍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패랭이꽃을 보느라 넋이 나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자신보다 일곱살 많은 28살의 청년 조성대 박사(전 상명여대 교수)를 만나 결혼하고 상경했다.
서울 중앙도서관에서 남편과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행정학 석박사 공부를 하는 남편과 같이 자신도 행정학 책을 읽으며 공부도 하고 문학도서도 읽었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 최고의 여류명사가 되길 기원하며 그녀에게 영어, 골프, 운전을 배우게 했고 남성들과 겨뤄 당당히 이겨야 한다며 주법도 가르쳤다고 한다.
덕분에 양주동 박사 등 한국 최고의 명사들이 강의하는 특수대학원도 다녔고 세계 유명한 곳에 여행을 보내 견문을 넓혀주기도 했다.
‘작지만 큰 인물’이라고 묘사한 남편덕분에 대학교 교수 및 의사, 변호사 등으로 구성돼 있는 성북구 여성단체협의회 회장도 지냈고 평통자문위원, 청소년 선도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여성부가 위촉한 여성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이하영 시조시인은 신사임당 백일장에서 장원을 수상, 등단한 이후 매년 꾸준하게 문학지와 동인지에 시조를 발표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사랑은 달빛을 타고’라는 시조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 여류시조문학회 이사, 한국 시조시인협회 감사, 사임당 문학회 운영위원, 시인정신 작가회 회장으로 있으며 그동안 7명을 등단시키고 현재도 5명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다.
그리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책을 읽는 이하영 시인은 어릴 적 가졌던 꿈을 되살리며 성북구에서 1시간 이상 걸리는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한국화를 공부하고 있다.
다례원을 다니며 절하는 법, 걷는 법, 인사하는 법, 손 매무새, 차 마시는 법 등 각종 행동거지까지 배웠다는 이하영시인을 취재하는 내내 뭐하나 갖추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당당했으며 다방면에서 전문가였다.
아마도 한국 최고의 여류명사가 되길 기원했던 남편의 많은 외조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가정 교육이 그녀를 당당한 한국여성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 하(霞) 빛날 영(煐)이라는 예명처럼 62세인 인생 황혼기를 빛나게 살고 있는 이하영, 아니 이영식시인은 엄격한 유림문화를 혁신하며 2남1녀의 자녀들에게도 한국 여성의 자존심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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