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어서인지 곳곳에 낚시를 하러 온 강태공들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직 마음을 놓기에는 하늘에 머물러 있는 먹구름이 너무나 선명했으며 일기예보 또한 쨍하고 해뜰날이 오려면 몇 일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보도했기에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저기압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날들이었다. 장마는 그렇게 무언가를 꼭 가져가고야 말겠다는 심보로 우리들 곁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모처럼 빗줄기가 그치자 금곡리 주민들도 하나둘 들녘에 나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농작물을 돌보고 있었다.
회남면 금곡리. 마을 앞으로는 대청호가 유수히 흐르고 주민들이 일궈놓은 각종 농작물들이 심어져 있는 논과 밭이 농가 주변에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안 봐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그들 역시 대청호 건설로 인해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금곡리는 쇠실(또는 선계촌)과 지승골(지승동) 두 개의 자연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25호 정도가 살고 있는 쇠실은 국사봉에 철광이 있어 쇠가 많이 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10여 호가 살고 있는 지승골은 쇠실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야 닿을 수 있는 먼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간 주민들이 쉽게 왕래하기에는 다소 먼 거리이다.
그렇다 보니 마을회관이 쇠실과 지승골에 각각 마련돼 있었다.
한우를 20여 마리 키우고 있다는 쇠실에서 만난 양재학(87) 할아버지는 작년에 지었다는 마을회관까지 직접 안내해주는 친절함을 베풀어주었다.
마을회관은 한눈에 보기에도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건물로 주민들의 생활에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곡리 마을에는 집집마다 위성 안테나가 달려 있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서가 아니라 위성 안테나 없이는 텔레비전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오지이기 때문이다.
금곡리는 특색 있는 작물보다는 벼, 과수, 고추, 한우나 염소 사육 등 농가마다 다양한 소득 원을 일구며 생활하고 있다.
대청댐 건설로 많은 농경지가 수몰되기 전에는 농경지뿐 아니라 주민수도 많았으나 이제는 70여명의 주민만이 금곡리를 지키고 있으며 대부분이 노인들이라고 한다.
금곡리 마을 봉사자로는 양성석(54) 이장과 정상우(43) 새마을지도자, 황복순(67) 부녀회장이 있으며 노인회장은 쇠실의 최선하(70)씨와 지승골의 양재하(82)씨가 있다.
그전에 주민들이 많이 살았을 당시 마을이 크고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각 마을에 노인회장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었다.다시 찾고 싶은 마을 금곡
# 남원 양씨 집성촌
금곡리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중 진천 문백리 산사에서 양거원이 동생 백원, 만원, 위원을 거느리고 피난처를 구하고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하루는 어느 도사가 말하기를 피난을 떠나게 되거든 말이 멈추는 데 가서 정착하라 하라기에 명심불망 하였다가 청주 대머리에 와서 말이 잠시 멈추더니 곧바로 찾아든 곳이 금곡리 옆 마을인 신추리인데 산색이 아름다워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아우 위원은 지금의 금곡리에 정착하였으며 전답 좋고 풍경이 아름다워 은군자의 소택이라 했다.
금곡리는 남원 양씨 집성촌으로 현재 20호 이상이 남원 양씨라고 한다.
마을 안에는 재실이 있어 해마다 시제를 올리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에 나무 대문과 흙담이 둘러져 있는 옛날 농가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
그래도 예전에는 이곳이 사람들에게 전답 좋고 풍경이 아름다운 살기 좋은 곳이었으리라.
# 추양정사
금곡리 마을 입구에는 <금강별곡>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 학자인 어당 이상수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추양정사가 있다.
본래 1911년 어당의 제자 호산 박문호가 스승의 옛 집터인 신추리에 건립하고 스승의 영정
을 봉안하였다가 뒤에 박문호, 양주승, 양주학, 양주하, 박용호 등 6명을 추가로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다가 1995년 이곳에 정면 3칸 측면 1칸 홀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을 신축하고 영정을 이전하여 봉안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을 공부한 유림으로 벼슬에는 욕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들이라고 한다.
정면에 ‘秋陽精舍’라 편액하고 앞에 일각문이 있다.
이외에 양주하의 처 신소성(1869-1951)여사의 효와 열을 기리는 효열부 영산신씨 소성여사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 국사봉에 얽힌 전설
금곡리 뒷산인 국사봉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산 정상부근이 굉장한 명당자리라고 한다.
옛날 이 명당에 묘를 만들면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된다고는 하나 그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고, 그 가뭄은 묘를 파내고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온다는 말하자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이 산에 조상의 산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과 가뭄을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여러 번 있었던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 정상에는 웬일인지 큰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돌무더기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때 재주 있고 매우 용맹스러운 남매를 둔 과부가 살았었다고 한다.
밤마다 이 산의 신령이 나타나 남매가 너무 비범해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천기를 다스릴 수 없을 터인즉 더 이상 주저하면 하늘의 노여움이 클 것이라며 과부를 꾸짖었다.
그리하여 과부는 아들에게는 나막신을 신고 당나귀를 끌고 하루아침에 한양에 다녀오게 하고 딸에게는 앞치마에 돌을 가지고 가 성을 쌓게 하는 내기를 시켜 지는 쪽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딸은 한번만 가면 성을 다 쌓게 되었다.
과부는 아들을 더 아끼는 마음에 몰래 딸의 치마를 찢어 놓았다.
결국 아들은 돌아왔고 딸은 찢어진 치마 때문에 성을 다 쌓지 못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국사봉 정상에 있는 돌무더기는 바로 딸이 쏟아놓은 돌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대추나무 가로수
금곡리에는 쇠실 앞 마을 입구에 대추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보기 드문 풍경이다.
아름다운 마을 조성에 보은의 특산품인 대추나무를 식재하자는 양성석 이장과 대추선도농가로 지승골의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최선하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뜻을 같이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2004년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은 마을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주민들의 소득도 증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도된 일이었다.
처음 심을 때 3∼4년 생이었던 대추나무는 주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파릇파릇한 잎을 피우며 열심히 자라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살이 오르기 시작한 애기 대추는 가을이면 빠알간 색으로 탐스럽게 익어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마을을 찾아 그 모습을 눈에 꼭 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추양정사나 효열부 영산신씨 소성여사 기적비를 보면 마을의 역사적 깊이와 전통이 느껴지고, 묵묵히 흐르는 대청호를 바라보면 그 속에 잠겨버린 주민들의 아픔이 다가오고, 땅에 뿌리를 박고 열매를 맺고 있는 들녘의 농작물들을 보면 주민들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 금곡리.
그곳에서의 삶이 힘들어도,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어도, 불만이 있어 화가 나도 금곡리 주민들은 내일도 그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대추나무를 심어 가로수 길을 만든 그들에게서 미래를 기약하는 희망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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