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북면 봉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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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봉황리
  • 보은신문
  • 승인 2006.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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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벽산 아래 봉황천이 마을을 휘도는 곳 모래벌
봉황리에는 푸른 벽처럼 생긴 청벽산이 있고 그 산봉우리에 봉긋 솟아 있는 속구바우란 것이 있다.

옛날옛적 100여 년 전 속구바우 주변에 재두루미(학)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새를 봉황이라 불렀다. 어느 날 마을 개구쟁이가 알을 하나 꺼내왔고 새는 그 후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한다.

마을에 살고 있던 학자로 명망이 높은 이공우란 사람이 산골짜기(정자골)에 정자를 지어 글도 읽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했는데 그 정자 이름을 ‘봉황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원 마을명인 모래벌을 봉황리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그렇게 불리어 오고 있다.

원래는 마을 주변의 땅이 모두 모래땅이어서 모래벌이라 했다고 한다. 보은-청주간 국도변에 위치해 있으며 내북면 최단 북쪽 마을이다. 청원군 미원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69호 130여 명 가량의 주민이 살고 있는 봉황리는 김정범(64) 이장과 이상국(83) 노인회장, 정군자(59) 부녀회장이 주민들과 화합하여 마을을 지켜나가고 있다.

봉황리에는 새마을지도자가 공석이다. 60대 이하의 젊은이를 찾아 볼 수가 없고 김정범 이장이 4번째로 젊다고 하니 농촌 사회의 노령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 한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노동의 과정에서 흘리는 땀방울은 값지다. 누군가는 가슴이 뿌듯하며 기분이 상쾌해진다고도 한다. 물론 그 정도에 따라 활력을 주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힘들고 지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 농사일이 힘들어도 올 한해 값진 땀방울을 흘리며 들녘을 풍요롭게 만들 봉황리 주민들. 젊은이는 없지만 그들이 지금껏 지켜왔고 아직도 가꾸어 가는 봉황리 마을은 젊음이 느껴진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시원하게 뻗어 있는 마을 안길, 곳곳의 거목 등 생기가 도는 모습이다.

# 원 마을 명은 모래벌
봉황리가 처음부터 지금의 위치에 마을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김정범 이장의 부친으로 작고한 김교동씨가 생전에 기록해 놓은 마을 유래 및 그 시절 마을 풍경에 관한 내용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김 이장이 취재 중 꺼내온 노트에서 김교동씨가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을 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을 사랑이 극진했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우측으로 들이 펼쳐져 있는데 음달말 모래벌이라 하는 그곳에 본래 132호가 살았고 냇가 건너인 현 봉황리 마을(건너 모래벌)에 6호가 살았었다고 한다.

모래들이라는 뜻의 사평(沙坪)에서 살던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건너 모래벌로 오다보니까 지금의 마을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을이 옮겨오면서 농경지로 변한 들을 새들이라 부르며 원래부터 있던 들판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들을 구들이라 한다.

이렇듯 모래벌이라 불리던 것이 일본 사람들에 의해 봉황리가 됐지만 주민들과 타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모래벌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김정범 이장은 모래벌이란 이름을 되찾고 싶지만 여러 가지 행정상 어려움이 따를 것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라며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쳤다.

# 장이 설만큼 번성했던 마을
봉황리에는 모래벌과 봉황휴게소에서 마을 쪽으로 예전에 집이 5·6호 정도 있었다는 도리비, 벌뜸, 굼뜸(새뜸), 주막뜸이 있다.

옛날 창리에는 장이 안 서고 봉황리에 장이 섰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서울과 경상도를 잇는 삼남대로(큰길)가 마을을 통과해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의 왕래가 많다 보니 주막이며 상점들이 하나둘 생겨나 주막뜸을 이룬 것이다.

김정범 이장은 음력 7월 보름 백중날이 되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날을 맘껏 즐기려는 인파들로 거리가 북적였다고 한다.

백중날은 고된 농사일을 해오던 머슴들이 이날 하루 휴가를 얻어 흥겹게 놀 수 있는 날이다. 이날만큼은 머슴을 둔 집에서도 이들을 쉬게 했으며 취흥에 젖게 했다. 또 그 해에 농사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워 위로하고, 상을 주는 등 머슴과 일꾼들을 위한 날이었다.

# 타 마을보다 앞서 선진마을로 우뚝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봉황리는 선진마을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다른 낙후된 농촌 마을에 비해 그 개발 수준이 10년 이상 앞섰으며 전국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보은군에서 이앙기가 제일 먼저 들어왔으며 비닐로 피복 한 흙에 고추 심는 걸 보고 사람들이 다들 놀라고 신기해했다고 한다. 봉황리는 충청북도 새마을 교육 현장 실습 교육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런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주민들이 하나된 마음으로 협동단결 했기 때문일 것이다.

봉황리는 동서남북 중 동쪽만 산이고 마을이 봉황천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마을 입구에는 국도로 통하는 긴 다리가 있는데 옛날에는 주민들이 해마다 나무다리를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여름에는 징검다리를 이용하고 추석 전전날인 음력 8월 13일이면 전 주민이 모여 돌을 쌓고(다리발), 짚을 엮고, 나무와 소나무 가지, 떼를 이용해 다리를 만들어 다음해 장마가 질 때까지 이용했다.

그 당시 땔감이 귀했기 때문에 이용하고 난 나무다리는 주민들에게 좋은 땔감이 되기도 했는데 일찍 가져가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늦장이라도 부리면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리니 그 때를 잘 맞추는 게 중요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새마을 사업 초창기인 70년 대 초반 전 주민이 합심해 밤에 횃불까지 피워가면서 다리를 놓았다. 주민들의 정성이 얼마나 들어갔으면 80년 보은을 덮쳤던 엄청난 수해에도 파손되지 않고 당당히 그 모습을 지켜냈다. 그러나 노후로 인해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 90년대 후반 지금의 다리를 새로 놓은 것이라고 한다.

봉황리가 타 마을에 비해 일찍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교회의 영향도 무시할 순 없을 듯 하다. 1925년 김교동 장로에 의해 건립된 봉황교회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영화 필름을 가져와 교회 마당에서 상영하는 등 선진화된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 다른 문명에 대한 개방 의식을 열어준 셈이기도 하다.

# 이승칠 의사 추모비
청벽산 아래 국도변에 세워져 있는 이승칠 의사 추모비를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봤을지도 모른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자결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1912년 일본 국왕 명치가 죽자 경찰로부터 상복 입기를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절하여 왜경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집에 돌아와 나라 잃은 백성의 통분을 억제할 수 없어 청벽산 속구바우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그때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원수의 상복을 입으면 백대의 수치이니 비록 죽을지언정 오랑캐의 상복을 입지 못하겠다”라는 자결시를 남겼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되었다.

# 깨끗한 자연 환경
봉황천은 다슬기가 서식할 정도로 물이 맑다. 마을 주변을 둘러보다가 호룡수 부근에서 다슬기를 잡아가는 사람이며 한가로이 앉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호룡수(虎龍水)는 능선이 용이 쭉 뻗어있는 형상으로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얼마 전에는 마을 주민이 놓은 그물에 걸린 고기를 먹으려고 그물을 무언가가 뜯어놓았다는 것이다. 꼭 수달이 한 것처럼 보인다며 봉황천에 수달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또 김정범 이장은 청벽산에서 이른 봄 부엉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 20여 년 정도 안 들리다가 최근에 들려온 걸로 봐서 부엉이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마을 안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길가에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어 주민들에게 좋은 쉼터가 돼주고 있다.

옛날에는 앉기만 하면 그곳이 놀이터가 됐으며 살기는 어려워도 밖에 나오면 산이나 냇가에서 먹을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옛 어른들이 추억하고 있는 것처럼 봉황천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곳의 자연은 추억거리를 안겨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러하기에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늘 뒤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에 옛날 야간보통학교가 있었으며 후일 내북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창리에 초등학교를 세우려고 학생들을 뽑았는데 학교 건물이 다 지어질 때까지 봉황리 야학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학교가 완공되고 난 후 옮겼다고 한다. 봉황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해왔다.

만 60세 주민이 가장 젊은 사람인 봉황리. 주민들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누워있는 사람 한 명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봉황리에는 그 어떤 젊은이들보다 지혜롭고 인정 넘치는 60대 젊은이들이 있다. 그들의 젊음이 언제나 일보 전진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김춘미 프리랜서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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