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속 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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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속 하판
  • 보은신문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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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인심이 담장을 넘는 곳 하판리(늘근이)
드디어 봄이 왔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를 맞는 학생들처럼 농민들도 긴 방학을 마치고 눈앞에 다가온 봄을 맞고 있다.  털털거리며 농로를 달리는 경운기 소리, 밭에 거름 펴는 소리, 농기계로 논가는 소리 등등 봄을 알리는 소리들이 귓가에 울린다.

겨우내 잔뜩 움츠렸던 땅이 기지개를 펴는 들녘에 농민들의 모습이 새겨지고 있다. 앞으로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농민들의 새 학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판리를 찾은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땅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마치 그날이 농민들의 봄방학인 듯.

하판리는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늘근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 늘근이 또는 하판근리(下板斤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철령(水鐵嶺)을 병합하여 하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자연 마을명인 늘그니(板斤里)는 상판리와 중판리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 다래나무 밀림을 노인이 들여와 개척했다고 하고 현재는 하판리 마을을 지칭한다.

한편 하판리 터줏대감인 임씨네가 늘그니라 불러서 그것이 마을명이 됐다는 말도 전해진다.
하판리는 김경식 이장(42)과 김금덕 노인회장(72), 홍순기 새마을지도자(57), 김하자 부녀회장(44)이 마을일을 돌보며 37호 103명이 오순도순 생활하고 있다.

# 예전의 생활모습

하판리에는 보은읍 종곡리로 넘어가는 구룡티 고개가 있다. 이는 아홉굽이가 졌다고도 하며 아홉 용이 나타날 지형이라고도 한다.

주민들은 한 30년 전 도로가 생기고 버스가 다니기 전만 해도 구룡티 고개를 넘어 보은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이른 아침 조식(朝食)을 챙겨먹고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구룡티 고개를 넘는 것이다. 그렇게 30리를 걸어 보은에 도착해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해가 질 정도였다.

하판리 주민들이 걸어온 시절에도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경험했던 고단한 삶의 시대적 초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누구는 장에 내다 팔 나무를 지게에 잔뜩 짊어지고, 누구는 아끼고 아끼던 추수 작물을 이고, 누구는 한 푼이라도 벌어볼 양으로 산으로 들로 다니며 캐 모은 나물이나 약초 등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오르내리던 그 길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에서만 오르내릴 뿐이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다닐 일이 없다보니,“길 첫머리가 아주 개구쟁이가 됐어”하는 한 주민의 말에 안타까움이 배어났다.

수가마골은 늘근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이곳에서 숯을 구워 붙여진 지명이다.
김금덕 노인회장(72)은 십대 중반 무렵 북실(보은읍 종곡리)로 직접 숯을 팔러 다녔으며 그곳에서 목탄방아를 돌리는 연료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하판리 숯가마는 기름을 사용하면서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덤바우는 수가마골에 있는 바위로 바닥에 있는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서 동네를 내려다본다하여 덤바위라 한다.

저녁바우는 추재나무(추자나무)골에 있는 바위로 해가 이 바위에 걸리면 저녁때라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바위에 걸리면 저녁밥을 지으러 집에 갔다고 하니 그 당시 주민들에게는 저녁바우가 시계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생활하던 시절에는 버섯이며 나물 등을 채취하기가 수월했으나 요즘은 나무가 무성하고 길이 험해 그것도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고 한다.

# ‘작은 서울’로 불릴 만큼 번성했던 마을

하판리에는 넓은 들이 하천을 따라 이어져 있는 섯밭들이 있다. 땅이 목숨보다 귀하고 농산물이 보배였던 시절에는 넓은 들과 토질이 좋은 땅이 주민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가구 수가 100호를 넘을 정도로 마을이 번성해 ‘작은 서울’로 불렸다고 한다. 집도 많고 골목도 많아 서울 사람이 오면 길을 못 찾았다고 하니 마을 규모가 얼마나 컸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타 마을 주민들이 내속리면 일대에서 쌀 팔아먹을 곳이 하판리밖에 없다고 했을 만큼 하판리의 과거는 화려했다.

이곳은 옛날부터 대추골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상궁, 나는 탄부, 나는 노티, 나는 원남“ “나는 가마 타고 왔지, 나는 트럭 타고 왔어, 나는 택시 타고 왔는데” 저마다 고향에서 가마, 트럭, 택시 등을 타고 하판리로 시집 온 마을 아주머니들은 “내가 시집 올 때만 해도 들녘이 온통 대추나무였어”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현재 하판리에는 대추나무 농가가 3가구며 그 중 김현목씨가 4,500평 규모로 가장 많이 재배한다고 한다.

보은대추는 그 맛과 향이 뛰어나 임금님께 진상한 특산물로 옛 문헌인 ‘음식품평서’에 의하면 ‘대추는 보은에서 생산된 것이 제일 좋다’라고 수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보은대추가 으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추고을의 명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면 좋았겠지만 대추나무는 병에 잘 걸려 농사짓기가 힘들다는 게 주민들의 입장이다. 특히 대추나무의 암이라고 불리는 빗자루병은 한 번 걸리면 2∼3년 안에 나무가 죽는 무서운 병으로 나무가 병에 걸렸을 경우 캐내고 다시 심어야 하기 때문에 작목전환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판리의 한우 사육 농가는 9가구로 1가구 당 사육규모가 큰 편이다. 제일 많은 농가가 100여 두며 보통 7~80마리 정도는 사육한다고 한다. 30여 마리를 사육하는 김금덕 노인회장에게 ”그렇게 많이 키우세요“ 했더니 “그게 뭐가 많어, 나는 많이 키우는 것도 아녀“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판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마을 곳곳에 있었다. 그대로 방치된 채 세월 앞에 제 몸만 축내고 있던 빈집은 미관상 보기도 좋지 않을 뿐더러 괜스레 주민들의 마음까지 허전하게 만들었다. 집주인들이 비용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집을 방치해두자 정부는 한 가구 당 철거비용으로 20만원을 보조해줘 10가구 이상이 터만 남긴 채 추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 후덕한 마을 인심 자손까지 대대로

몸도 나이를 먹고,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몸은 늙는 반면 마음은 무르익어 간다. 무르익은 마음이 고운 빛을 띤 하판리 주민들. 하판리는 주민들 인심이 남달리 좋은 곳이다. 어느 시골마을이 이보다 못 하겠냐만 하판리는 좀 특별한 것이 있는 듯 하다.

고추이식이나 못자리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을 할 때면 동네 사람들이 2·30명 모여 집집이 돌며 일을 해준다고 한다. 그러면 일을 부탁한 집에서는 식사를 준비해 고마움을 표시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눔의 미덕을 행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건 베푸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곳에 항상 기쁘고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붉히고 마음 상하는 일보다는 함께 즐기고 나누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기대고 몸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는 마을 하판리. 특히 노인회장 김금덕씨와 아주머니들의 왕언니 강복례(74)씨는 평소 마음이 넓어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고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한다. 강복례씨의 경우 워낙 부지런해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과 나눠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는 등 어머니 같은 맘으로 항상 주민들을 챙긴다.

자손들 또한 인심 좋은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인지 애향심이 각별하다. 출향인들은 노래방 기계와 방송 마이크, 천막(행사용)을 마을에 기증하는 등 늘 고향마을에 관심을 쏟고 있다.

하판리에는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결성한 ‘상조계’가 있다. 계원이 한 30여명 되며 이들은 마을에 초상이 나면 서로 힘을 모아 다함께 일을 처리한다. 또 1년에 한번씩 마을 잔치를 벌여 동네 어른들을 대접한다고 한다. 그럴 때면 아이들과 함께 내외가 다같이 내려와 음식도 장만하고 어른들의 노고(勞苦)도 위로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 건강관리실 마련 등 숙원사업

하판리 마을 회관에서는 건강기구나 운동기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주민들은 건강관리실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아쉬움을 많이 드러냈다. 요즘 농촌에서는 마을에 마련된 건강관리실이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만큼 필요성이 크다는 것이다. 건강관리실은 아니더라도 우선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기구만이라도 마을회관에 마련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전보다 도·농간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도시의 어느 기관이나 단체, 기업체 등과 자매결연을 맺는 농촌마을이 늘고 있다.

하판리와 자매결연을 맺으면 좋은 품질의 농산물도 구매할 수 있고 그보다 더 값진 주민들의 훈훈한 인정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줄 텐데 아직 인연이 닿은 곳이 없어 안타까웠다.

혹 부모님 같은 편안함, 가족 같은 믿음, 친구 같은 정다움이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면 하판리와 자매결연을 맺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행운은 아무에게나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판리 주민들은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판리는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보은행 버스가 하루에 7번 들어오지만 왕복 차비가 적지 않고, 속리산으로 갈 경우 상판리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차비가 더 많이 든다.

그래서 주민들은 농한기 때 쉬는 동안 보은이나 속리산은 차비가 많이 드는 관계로 마을에서 할 수 있는 부업거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농사짓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한 형편이니 농민들이 부업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좀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할 수 있는 농가 부업이 많이 지원되길 바란다.

부모님 세대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사치며 호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글을 깨우치지 못해 면사무소나 농협에 가서 일을 볼 때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타는 속이 열길 물속이라 글을 배우고 싶어도 그럴만한 여건이 안 된다. 보은읍에 한글학교가 있지만 하판리 아주머니들은 차비도 많이 들고 하다보니 선뜻 나설 수가 없다.

마을이나 면 단위 별로 한글학교를 운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해봤다. 물론 자원봉사를 해줄 수 있는 대학생이나 젊은이들이 턱없이 부족한 농촌으로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농한기 때만이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아주머니들의 글 읽는 소리가 하판리에 울려 퍼지길 기대해 본다.
/김춘미 프리랜서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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