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북면 법주리 - 4개의 자연마을이 하나가 된 버드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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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법주리 - 4개의 자연마을이 하나가 된 버드리마을
  • 송진선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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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신앙이 깊숙이 자리잡았던 때 어느 동네나 할 것 없이 동제사를 지냈다.

동제사를 지내는 의미는 혹시나 마을에 불어닥칠 재앙을 없애고 안녕을 기원하며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동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생길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적은 음력 연초에 1년간 일어날 모든 일에 축복을 기원하니 마을 주민 모두가 안심을 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기독교인이나 불교신자들이 하느님이나 부처님에게 기대는 것과 같은 심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편리성의 추구로 인해 동제사는 이제 지내는 마을보다 지내지 않는 마을이 더 많다. 이는 농촌마을 구성원들이 노령인데다 부녀화로 인해 대부분 산제당까지 가는 것도 힘들 뿐만 아니라 제단까지 제물을 가지고 갈 인력도 없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호에 소개할 내북면 법주리는 언제부터 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마을의 대표적인 전통인 동제사를 거르지 않고 있다.

이는 이장인 김록기(62)씨가 음력 1월5일 동제사를 담당하면서 노인회장 염규헌(74)씨, 새마을지도자 황국경(48)씨, 부녀회장 강애자(50)씨를 비롯한 38가구 세대주들의 소지를 모두 올려 마을의 안녕과 76명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중뜸, 음지말, 양지말, 새터로 이뤄진 법주리 분위기는 지금 평화 그 자체이다.

# 동제는 마을의 가장 큰 행사
이렇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주민의 생기복덕을 기원하는 동제는 마을의 가장 큰 행사다.
전에는 구룡산 정상에 있는 산제당까지 제물을 옮겨 차리고 제를 올렸다. 바위가 있고 제단은 평평하게 돼 있으며 수령이 오래된 참나무 3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젊은이들 보다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산제를 지내기 위해 산 정상에 오르는 것도 힘들 뿐 아니라 제물을 옮기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특히 동제사를 지내는 시기가 한 겨울 이기 때문에 눈이 내리는 경우가 많아 한 밤중에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결국 마을에서는 산제당 옮기는 것을 주제로 회의를 열었고 2004년 주민 합의 하에 지금의 자리인 구룡산 하단부에 새로 산제단을 만들었다.
산제단을 옮기면서 정상에 있는 산제단에 잔을 붓고 이전 신고식을 하고, 옮긴 후에도 마찬가지로 잔을 올리고 신고식을 했다. 마을 전체 주민들이 나와 돌을 쌓고 산제단을 만든 것은 물론이다.그만큼 산제를 지내는 일이 주민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올해도 음력 1월5일 산제를 지냈다. 특히 이 마을은 산제단에서의 산제 외에도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2기에도 제를 지낸다.
이 뿐이 아니다, 음지 말에 있는 굴뚝샘에서도 제를 지낸다. 우물이 굴뚝 안과 같이 생겼다해서 붙여진 굴뚝샘은 옛날 가뭄이 심할 경우 부녀자들이 키질을 하면 3일 안에 비가 내렸다고 하는 전설도 안고 있다.
지금과 같이 각 가정마다 자가수도가 있던 때가 아닐 때 굴뚝샘에서 물지게를 이용해 먹을 물을 퍼 날랐고 빨래 또한 여기서 했다. 그만큼 주민들에게는 소중했던 곳이다.
지금은 기계를 이용해 100m이상 암반관정을 파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먹을 물을 해결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지표수를 먹을 물로 하는 우물이 고작이었다.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 당연히 마실 물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녀자들이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소중히 다뤘던 것 처럼 물 또한 신성시 하고 소중히 다뤘다.
굴뚝샘에 제는 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주민들은 제를 지낸 때문인지 아니면 수원이 풍부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굴뚝 샘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저녁 11시에 산제를 올리기 시작해 총 6군데에서 제를 지내고 나면 이튿날 새벽2시경에 끝이 났다. 이날 딱 한 번 지낸 것도 아니고 마을이 생긴 이후 마을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
마을에 젊은이가 없으니 아마도 나중에는 지내고 싶어도 지내지 못할 처지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또 편리성 추구로 인해 지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법주리는 이 유서깊은 전통을 계속 이어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주작 담배에서 지금은 고추
군내에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북면은 담배 주산지였다. 논보다는 밭이 많은 법주리도 거의 모든 농가가 담배농사를 지을 정도로 주 재배작물이 담배였다.
담배농사가 한창일 때는 한 농가가 50단, 면적으로는 1만5000평에 이르는 규모다. 엄청난 규모인 것이다.
이렇게 마을 대부분의 농가가 담배농사를 지어 소득을 얻고 자녀 학비를 마련하는 등 주 재원이 됐다.
담배농사 때문에 각 가정마다 자녀들을 고등학교 이상 대학공부까지 시켰고 가계소득도 높였다.
지금 농가의 부의 원천이 됐던 담배농사는 90년대 초까지만 경작하고 이후에는 노동력 부족 및 노령화로 인해 담배를 심었던 밭에는 고추가 대신하고있다. 주작이 고추로 변한 것이다.
자녀들도 모두 학교공부를 시키고 출가시켰으니 아등바등하며 돈을 벌기보다는 자신들도 먹고 자녀들에게도 줄 정도만 농사를 짓고 있다.
고추 외에도 일부에서 사과, 배, 복숭아를 재배하고 박행규씨가 임야에 초지를 조성해 한우 70여마리를 사육하고 농업경영인연합회장인 이상욱씨가 돼지 180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 도종환 시인도 한 동네 사람
법주리에는 유명한 시인인 도종환 시인이 이 마을 조정골에 살고 있다. 휴양차 머무르고 있는 것이 벌써 3년째 된다.
동료의 집인 이곳에서 그는 아궁에 장작불도 지피고 여름이면 채마밭에서 상추 등을 재배해 식탁에 올리고 닭도 키우는 등 전원생활 속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도종환 시인을 보기 위해 1년이면 100여명 이상이 문인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도종환 시인은 아직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 아직 완전한 보은사람은 아니지만 보은에서 황토 흙집에서 심신의 안정도 취하며 작품 활동에 충실하고 오장환문학제 추진위원장을 맡는 등 보은에서 이뤄지는 각종 문화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록기 이장은 도종환 시인이 법주리에 살기 위해 부지도 마련했다는 얘기도 했다. 또 문인 등 도종환 시인의 지인 4, 5명이 이곳에 살기 위해 집을 지을 수 있는 터도 마련했다는 말도 했다.
도종환시인으로 인해 법주리는 젊은이들이 거의 떠나고 빈 둥지를 지키는 노인들이 사는 곳에서 외지인 전입해와 활력을 찾는 지역으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다. 군이나 토지공사 등에서 택지를 조성해놓고 분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맘이 맞는 지성인들이 집단을 이뤄 이주해오기는 법주리가 처음이지 싶다.

# 출향인 애향심 남달라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법주리 출향인들의 애향심도 남다르다. 특히 연로한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식들의 마음이 갸륵하기까지 하다.
마을에 정미소가 없어 방아를 찧을 경우 동산리까지 수십리를 경운기를 끌고 가야하는 실정이다. 젊은 사람들도 국도를 달리는 많은 차량들로 인해 경운기를 운행하는 것이 위험한데 노인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늘 불안하게 생각한 출향인들로 구성된 청년회(회장 염종대, 총무 이재준)에서 쌀 방아를 찧을 수 있는 정미기를 들여놨다. 많이 찧을 때가 아니고는 그 때 그 때 이곳에서 편리하게 방아를 찧고 있다.
또 출향인 청년회에서는 경로당에 노래방 기계도 설치해줬다. 겨울철 마을 주민들이 밥도 해먹고 하루를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주민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 것.
마을 주민들은 출향인 청년회원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이외에 법주리 출신 김응호씨를 보더라도 출향인들의 애향심이 어느 정도인가 가늠할 수 있다.
1997년 김응호씨는 자비를 들여 주성이었던 내북면 곳곳의 마을 및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책자를 발간했다.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지, 전국지리지, 구 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 등을 참조해 서적을 발간, 정확성을 기하는데 충실했다.
그는 이 책자를 발간하면서 "우리 고장은 특별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연구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므로 주성은 주성인이 발굴하지 않으면 실체를 알기에는 힘든 일이다. 모든 유산은 고행의 맥이고 혼이다. 서로 아끼고 보존하자. 그리고 개발하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로 거주민은 출향인을 위하고 출향인은 거주민을 위하는 법주리는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 시내버스 증회 운영 주민 희망
염둔리에 한국화약 입주로 염둔리가 없어지면서 한국화약을 지나는 법주리 방향의 마을은 법주리 뿐이다. 당연히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주민이 적어 이곳을 운행하는 시내버스는 아침 7시에 들어왔다가 7시10분에 나가면 끝이다. 이 차를 놓치면 수십리 걸어 내북중학교 입구까지 나가야 시내버스를 탈 수 있다. 노인들이 걸어나가기에는 보통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출발하는 차이기 때문에 청주 등 도시로 나갈 일이 없을 경우 학생도 아닌 주민들이 이 차를 이용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 사실이다.
보은시장이나 창리를 나가기가 너무 불편해 주민들은 오후 시간대에 한번만 더 들어왔다가 나가기만 해도 좋겠다고 한다.
젊어서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절염을 앓고 있어 걷기도 불편한 노인들이 대부분인 법주리 주민들의 소망을 행정기관과 시내버스 회사에서 꼭 챙겨보기를 기원했다.
 마을에 광장을 조성해 동네에 큰 일이 있을 때 차량 주차를 맘놓고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 중인 법주리를 돌아 승용차로 시내버스 차량이 자주 닿는 국도까지 나오는데 한참을 달려야만 닿을 수 있었다. 시내버스 증회 요구가 무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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