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알처럼 속이 꽉 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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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알처럼 속이 꽉 찬 마을
  • 김춘미
  • 승인 2005.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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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마을 이야기(27) - 산외면 가고리
겨울이 코앞에 닥친 계절의 경계선 너머, 찬바람이 몹시 불어오던 날이었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추위 앞에서 겨울 코트를 꺼내 입어야 할지 아니면 좀더 인내심을 갖고 참아야 할지, 아침부터 고민이었다.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 앉아‘그래도 아직은 이르지’하며, 내일은 4년 전 보은 장날 어머니가 사준 오천원 짜리 검은색 스웨터를 입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큰(?) 고민을 해결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번 호‘마을탐방’지인 산외면 가고리를 찾아 나섰다.

차로 한참을 달리고 몇몇 마을을 지나치자 첩첩산중, 길은 높은 고개로 이어져 있었다. ‘아직도 멀었구나’ 생각하는데, 고개를 넘는 순간 드디어 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둘러싸인 산과 어딘가 허전해 보이는 작은 규모의 마을, 그곳이 가고리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마을회관 앞에 도착하자 이장을 맡고 있는 홍순덕(57)씨가 미리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21호 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가고리는 홍순덕 이장을 비롯해 노인회장 노운호(72)씨와 새마을지도자 이상열(50)씨, 부녀회장 정종순(46)씨가 마을일을 보고 있다.

# 옛날에는 부자마을
가장 높은 산인 마을 서쪽 국수봉 아래 세월의 변화가 아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주민들은 주로 벼, 담배, 고추 등을 재배해 생활하는데, 21호 중 실질적인 경작인은 11호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주위에 산이 많은 탓에 경작할 땅이 부족해 인근 지역인 청원군 운암면 금관3리 가막골과 개골 등지에 농지를 보유하고 있다.

논보다는 밭이 더 많지만 논은 고래실이라 땅이 기름져 쌀이 좋기로 유명하다. 맛 좋고, 질 좋은 쌀이 그들의 자부심인 셈이기도 하다.

겉은 허름해 보이지만 옛날에는 부자마을이었다. 담배농사로 수입이 좋아 자식들 다 공부시키고 자랑거리로도 삼았다. 그러나 지금, 한여름 땡볕의 뜨거움을 피해 이른 새벽 담뱃잎을 따는 농가는 5가구뿐이다. 보통 1가구 당 30단 정도의 규모다.

굳이 그 좋은 수입원을 관둘 수밖에 없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예전에야 나도 젊고, 이웃도 젊고, 아이들도 곁에 있어 도움이 되는 손길이 많았다. 그때만 같으면 좋으련만... 잘해보고 싶어도 일손이 없다.

작은 규모야 가족들끼리 어떻게 해본다지만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농가에서는 한해 농사를 힘들게 짓고도 인건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한다. 더군다나 인력시장에 나가 비싼 노동력을 공급해야 하니 부담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농촌의 노동력 부재 현상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더욱이 단가를 맞추는 농사를 짓기가 어려운 농촌 실정으로 인해 농민들이 소득작물을 쫓는 흔적이 보였다. 윗말 앞 많은 자금을 들여 설치한 시설 하우스에 채소 대신 담배가 들어가 있는 것도 그렇고, 인삼 포를 시도하는 것도 그렇다. 마을회관 앞에서 기장쌀을 타작하고 있던 노인회장 노운호(72)씨는“2년 전엔 이것도 가격이 좋았는데, 지금은 형편없어”하며 답답한 심정을 내비쳤다.

우리나라 농민은 힘이 없다. 근데 참 신기하다. 빼빼 마르고, 키 작고, 보기에도 왜소해 보이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와 쌀가마를‘으이챠’한마디면 어깨에 훌렁 짊어지는지. 남들은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해도 힘들다 쉬어야겠다 하는데, 우리 농민은 볏짚 묶으랴 콩 타작하랴 메주 만들랴 쉴새없이 일을 해도 어떻게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소죽을 쑤는지. 이런 농민들이 힘이 없단다. 참 이상하다.

# 범죄 없는 마을
가고리 마을회관 외벽에는 '범죄 없는 마을' 현판이 자랑스레 걸려있다. 그것도 세 개씩이나! 어렵던 시절에는 '잘 살아보세∼' 노래까지 부르며 다같이 힘을 모았다. 그러다 좀 살만하니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 든다. 사람들이 말한다. “세상 인심 많이 변했네. 옛날이 좋았지.” 사람들이 또 말한다. “그래도 농촌 인심은 아직 살아있어.”

그 옛날 어머니에게 100원짜리 하나 얻어 눈깔사탕 사먹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옆집 아줌마가 어젯밤 제사를 지냈다며 아침 일찍 담 너머로 건네준 떡이며, 고기, 과자 등을 먹을 때만큼은 매일 사탕을 빨고 있는 가겟집 딸 미자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가고리가‘범죄 없는 마을’이 될 수 있었던 건 예나 지금이나 나 먹을 거, 내 자식 먹일 거, 조금씩 떼어 이웃에게 나눠주는 주민들의 마음이 한결같기 때문이 아닐까. 거기다 제일 힘들다는 자식 농사도 잘 지어서 다 반듯하게 성장했으니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주말이면 집에 내려와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드는 착한 자식들이다. 젊은이들은 비록 몸은 도시에 나가 있지만 ‘고향계’를 결성해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마을회관에 노래방 기기를 마련하는 등 꾸준히 고향 살림을 챙기고 있다.

또한 한달에 한번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 돈독한 향우 애를 다지고 고향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 서로 상의하며 늘 고향을 생각한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떠나고 없는 빈자리는 결코 채워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나마 노력하는 이들이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됐다.

‘가고리(加古里)’는 일제시대(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당시 마을을 형성하고 있던 골말, 양지말, 부자골, 중뜸을 통합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본래는 옛날 어느 성인이 이곳을 지나다 지형이 높은 위치에 마을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아늑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더구리 또는 덕우리(德友里)라 불렀다고 한다.

德友. ‘덕이 있는 벗’이란 뜻이다. 그 성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선견지명이 있는 듯하다. 먼 미래에 ‘범죄 없는 마을’이 될 거란 걸 감 잡았을지도 모른다.

옛 선조 들은 德. 友. 란 뜻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자 서로 양보하고 도와주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인품이 후손 대대로 전해져 ‘범죄 없는 마을’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마을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크다. 위치, 지리적 특성, 주민들의 희망, 포부, 바램 등 어떠한 뜻을 품고 있다. 일제에 의해 지금껏 ‘가고리’주민으로 살아왔지만 이름을 다시 되찾아 ‘덕우리’주민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감이 있는 풍경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아직도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이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다른 나무에 비해 색깔이 화려해서 만은 아니다. 감이라면 홍시건, 곶감이건, 단감이건 뭐든 다 좋아하는 탓에 시선이 저절로 감나무에 가서 박혀버린 것이다. 사람도 참기 힘든 매서운 겨울 바람을 저 여리고 여린 감들이 견디다 못해 언젠가는 땅에 떨어져 못쓰게 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마을 곳곳에 심어져 있는 많은 감나무 중 그런 안타까운 나무가 몇 그루나 있었다. 홍순덕 이장의 말로는 감이 잘 돼 해마다 풍년인데 노인들이 많아 다 수확하기란 힘들다고 한다. 여름에는 장사꾼이 와 관심을 보이더니 해가 넘어가는 데도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며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부지런한 농민의 근성으로 보면 상상도 못할 일이 농촌의 고령화란 사회적 현실 앞에 당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홍순덕씨가 부인이 준비해 준 홍시 한 상자를 가져가 먹으라며 주었다. 그걸 차에 싣고 오는데, 다음날 스웨터만 입고와도 마음이 훈훈해 춥지 않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도착해 직원들과 나눠먹고, 기사 쓰다 안 풀려 몇 개 먹고, 누구는 집에 있는 엄마 생각에 챙겨가고, 누구는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조금 담아가고, 오고가는 손님들 하나씩 대접하고... 우리는 달콤한 홍시를 먹으며 추억을 삼켰다.

# 1˚만 시선을 돌려
6년 전 마을 앞으로 청원군 금관리를 잇는 지방도로가 2차선으로 뚫렸다. 도로 사정도 안 좋고, 교통도 불편했던 시절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가까운 청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이제 도로도 생기고 좀 편해졌나 했더니 웬걸, 누구를 위한 길이란 말인가.

홍순덕 이장이 말했다. “그래도 평일에는 괜찮아요. 근데 주말이면 경운기를 몰고 나가기가 겁이 날 정도예요.” 봉황과 원평을 거쳐 가고리를 지나 속리산으로 가는 관광 차량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순히 마을 앞을 통과하는 차량의 숫자가 아니다.

농촌의 주인은 농부고, 어촌의 주인은 어부고, 저기 강원도 영월 땅의 주인은 광부다. 그런데 이건 신이 내린 정의라 인간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농부의 아들, 딸들은 운전을 해도 앞에 가는 경운기를 혹독하게 추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나이 많은 어른이‘겁이 난다’는 표현을 썼다. 보지 않아도 차량 통행이 많은 주말이면 도로 위 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아직까지 사고는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내 고장 명산을 찾는 관광객이 왜 고맙지 않겠는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부탁하고 싶은 것이다. 1˚만 시선을 돌려 내가 추월할 때 바짝 긴장하는 주민의 겁먹은 얼굴을 한번 바라보자. 좀더 여유 있는 사람이라면 경운기가 도로를 빠져나갈 때까지 뒤에서 에스코트 해주는 건 어떨까.

몇 분 늦게 가도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가고리는 겉은 허름해 보여도 속이 꽉 찬 석류 알처럼 실속 있는 마을이다. 정직하게 벌어 알뜰하게 쓰고, 땅이 좋아 농작물 수확도 좋으니, 도시에 집도 마련하는 등 내실을 든든하게 다질 수 있었다.

한 나라에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는 국민의 역사가 있고, 한 가정에는 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한 마을에는 주민들이 일궈온 공동체의 역사가 있다.

먹고살기 위해 혹은 죽음 앞에 하나 둘 고향을 떠나고, 이젠 그들만이 남았다. 새로 정착하거나 돌아오는 이 없이 누구나 떠나기만 한다면 먼 훗날 마을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고향을 사랑하는 자손들이 있기에 가고리 주민의 역사가 오래도록 쓰여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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