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면 조곡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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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면 조곡1리
  • 송진선
  • 승인 2005.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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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면소재지였던 새실 마을
대청호로 인해 대부분 지역이 수몰되고 남아있는 마을 중에서 조곡1리 새실 마을은 33호,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지만 회남면 내에서는 큰 마을에 속한다.

회남면이 아닌 다른 면 지역에서 33호는 보통이지만 대청댐 조성으로 인한 대부분의 마을이 수장돼 상당수가 고향을 등진 지역적인 여건으로 큰 마을인 것이다. 3호가 큰 마을에 속하니 자연히 지역세가 열악하다는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회남면은 회북면과 함께 감고을로 유명했다. 지금은 영동이나 상주로 감고을의 명성을 빼앗겼지만 회남면의 감은 가정의 부를 상징했을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대청댐 조성으로 인해 감나무도 수장이 되긴 했지만 남아있는 감나무는 가을철 안개로 인해 수확기에 접어든 감의 꼭지가 빠져 수확되는 감이 얼마 없자 회인 감이 차지했던 감의 왕좌는 영동과 상주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조곡1리 새실 마을도 동네 안에 감나무가 많아 외부에서는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감나무가 빼곡했다. 종은 지금 대중적인 품종인 둥시가 아니라 이보다 더 크고 당도도 높은 월하이다. 은 가을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동네 안에 가득한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이 또 하나의 마을에 풍경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을 젊은이와 학생들의 꿈의 산실인 마을문고를 잘 운영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도로변에서 마을 부녀회원들이 토종 농산물 판매장을 운영해 이득금으로 이웃돕기도 하는 등 주민간 화합하며 오손도손 살고 있는 조곡1리 새실마을.

슈퍼 복숭아를 생산한 농민으로 유명한 박범선(53)씨가 이장을 맡고 있고 민경성(70) 노인회장, 이상복(53) 지도자, 정희숙(55) 부녀회장이 이 마을의 발전과 주민의 화합을 일구는 마을의 얼굴이고 일꾼들이다.

# 옛날에는 회북보다 남이 더 부유
마을 앞에는 대청호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물이 들어와도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빠진 곳에는 저절로 초지가 조성되었다. 물과 잘 어우러져 있다. 끔 사진작가들이 와서 카메라 다리를 놓고 대청호를 주제로 사진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앞에는 산을 절토해서 조성된 마을, 거교리가 보인다. 몇몇 새로 별장처럼 지어진 주택들을 보면서 매일 사람이 상주하는 집인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기야 사람이 상주하지 않고 별장으로만 사용해도 어쨌든 이곳이 좋아 찾아온 사람이 아니겠는가. 떠나는 사람 일색인 보은에서는 반가워 해야할 대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청댐이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회인지역이었고 지금은 회남·북으로 분리됐지만 회남지역의 땅이 기름져 농사도 잘되고 농지도 많아 회남사람들이 맥주를 마실 때 회북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신다고 할 정도로 회남면이 더 부유했다.

기름진 땅이 많았던 조곡리는 당연히 지역경제의 중심에 섰을 정도로 부자동네였다. 표적인 집이 황부자 집으로 한 번 가을걷이를 하면 3년 먹을 양식이 나온다고 할 정도로 옛날 천석꾼 했던 것처럼 그런 부자였다.

# 일제시대 관청이 있던 소재지
그런 마을이 가진 경제적인 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곡리는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처음 면사무소가 생겼는데 회남면 면사무소가 설치된 행정 소재지였다.

그래서 인지 아무튼 마을이 삼태기에 물건이 수복이 담긴 형태로 좌우를 산이 막고 있는 것이 복이 새지 않는 울타리처럼 보였고 아담하지만 제법 크다. 름철 아침 5시면 과수원에 나가 저녁 9시가 다 돼서야 집에 올 정도로 과수원에 온갖 정열을 쏟는 박범선 이장의 시간을 뺏어 마을에 대해 취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제시대 관청의 흔적이 남아있는가, 마을의 농업적 특성, 특산물, 마을 숙원사업 등 마을에 대해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물은 후 찾은 관청이 있었던 곳은 관청이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면사무소로 이용했던 안채를 중심으로, 바깥채와 창고가 있고 사방이 막혀 있었다. 날 관청이었다는 것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박범선 이장의 기억 속에 면사무소가 있었던 집 담이 돌담이었다는 것. 금도 여전히 검은 색을 띤 돌담이 일부 무너지기는 했지만 아담하게 집 앞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 집은 터가 좋은 때문인지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이상길(57)씨의 아버지 이동우씨 슬하의 자녀 8남매 중 4명이 은행 지점장, 투자신탁 회사의 간부 등으로 있는 등 소위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 한다.

박범선 이장은 아마도 조곡리에서는 가장 자식농사를 잘 지은 집이 아닌가 라고 손꼽았다.

# 새청사, 지명에 걸맞게 회남파출소 들어서
조곡리에는 새청사란 지명이 있을 정도로 관공서와는 인연이 깊다. 마도 지금의 거교리에 산을 깎고 앉은 면사무소가 이곳에 들어섰다면 과연 지역 지도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수상이나 이 지역의 장래 운명과 맞아떨어졌다면 회남의 역사를 다시 썼을 수도 있다.

이사를 할 때도 호주의 운에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새청사라는 지역이 있고 회남면을 행정구역으로 구획하면서 처음 일제가 행정관서를 설치한 곳이 바로 조곡리 새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에 면사무소를 신곡리로 이전했다가 담수로 인해 거교리 사당마루의 산을 깎아 면사무소를 앉힐 때 조곡리 주민들은 새청사 지명도 갖고 있었고 처음 회남면의 소재지였던 전통을 다시 찾기 위해 개발위원들이 중심이 돼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돼지굽이를 밀어 면사무소를 앉히는 방안을 주민들이 모색했었다.

그러나 돼지굽이는 사유지였고 행정기관에서는 청사 부지를 무료 제공받으려 했기 때문에 무산됐다. 범선 이장은 아마도 돼지굽이에 면사무소를 앉히는 것을 계속 진행했다면 면사무소가 거교리가 아닌 조곡리로 다시 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회남면사무소가 위치한 거교리 날망의 산도 개인 사유지로 희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부지를 매입했기 때문. 래도 새청사 지명을 갖고 있는 곳에는 회남파출소가 들어섰다. 기관은 모두 소재지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회남 파출소는 예외다.

# 특산물 옛날엔 감 지금은 과수
회인 감은 전국에서 알아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적어도 대청댐이 생기기 전 까지만 해도. 남면에서 5톤 트럭 1대 분량이 매일 인천으로 올라갔는데 곶감을 깎지 않고 생 감으로 가져가도 앞다퉈 사갔다.

크고 당도도 높은 회인 감은 주민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보물이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감나무가 많았고 마을만 해도 바깥에서는 동네가 안보일 정도로 감나무가 빼곡했다.

그러나 대청댐 수몰로 10월말까지 수확기의 감은 안개로 인해 꼭지가 물러 떨어져 감나무에 달려 있질 못했다. 금도 달리기는 하지만 이제는 수확할 인력이 없어 제때 수확을 할 수 없자 익어서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고 까치 밥이 되기도 하는 등 과거 부의 상징 감이 애물이 돼버렸다.

논보다는 밭이 많았던 조곡리는 땅이 비옥해 농사가 잘됐고 수몰되기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던 담배는 거의 1등급만 생산될 정도로 옥토였다.

그런 비옥한 토지는 모두 대청댐에 수장시키고 대신 옛날 같으면 화전같이 상대적으로 영농기반이 취약한 농지에서 농사를 짓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래도 주민들은 논농사도 일부 짓고 주로 밭농사 중 고추 등 밭작물과 과수, 일부 축산 농가가 있다.

박범선 이장은 과수에 대해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 청주 등 중부권 농산물 시장에서는 거의 박스를 뜯지 않고도 1등급을 줄 정도로 좋은 과일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복숭아에 접을 붙여 만든 슈퍼 복숭아는 당도도 일반 복숭아 보다 높고 크기는 두 배에 가까울 정도다. 아직 대량 상산 체제가 안됐지만 농산물 시장에 출하만 되면 복숭아 시장 석권은 따 놓은 당상이다.

박범선 이장은 대청, 청주 등지에서 회남면 지역을 많이 찾고 있는 것을 농산물 판매로 유도, 시범농장을 만들어 도시민들이 와서 농장에서 봉지씌우기나 수학하는 체험도 하고 따서 먹어보기도 하며 돌아갈 때는 그 과일을 사가지고 갈 수 있도록 구상을 하고 있다.

지난해 조성된 마을광장에는 벤치와 팔각정 등 주민들의 쉼터를 조성해 마을주민들이 담소도 나누고 농작업의 피로도 풀면서 화합을 다지는 곳으로 각광을 받는 등 마을에는 주민들이 음용수로 이용할 상수도 설치와 함께 마을 들어오는 입구 회남교회 주변 4가구의 지반이 기울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수하는 것이 당면 숙원사업이다.

이곳은 터를 돋궈서 집을 지은 것인데 4, 5년전부터 돋군 흙이 유실되는 등 지반이 약해져 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 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늘 불안하다며 수몰지와 사유지 접경지역에 돌망태 등을 설치해 지반을 다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희망했다.

<새로쓰는 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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