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더불어 산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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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더불어 산 60년
  • 보은신문
  • 승인 1990.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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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시장의 터주대감 이상운씨
1929년 삼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4살의 어린 나이에 점원생활로 장사와 인연을 맺었던 이상운씨(75)는 한 평생을 외곬 상인으로 살고 있다. 일제하에서의 상인 생활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력이 심했고 특히 나라고 없었던 우리 민족이 돈을 벌기에는 너무나 벅찬 처지였다. 이런 시기에 그가 1938년 태홍백화점 9년 6개월의 점원생활을 청산하고 9백5십원(당시 소값 12원)으로 조일상점이라는 서적취급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내 장사를 시작할 때는 자본대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며 “일제시대이다 보니까 돈 구하기도 힘들었고, 한국인의 장사에는 방해도 많았고 강매(强賣)도 있었기 때문에 물건 파는데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회고하는 이상운씨는 7평 정도되는 조그마한 가게에서 물건 하나하나에 인심을 심었고, 그결과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취방(諏方), 산신(山神), 상전(上田)이라는 큰 가게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전쟁으로 인해 조일상점은 전소되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소금장사였다. 날씨에 좌우되는 상품이고 생활필수품인 까닭에 소금을 찾는 이는 무한정이었으므로 가격도 제법 고가였다. 바로 이 소금장사로 그는 그동안 주렸던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자신의 가게를 준비하였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1960년 당시 학림 수리조합의 26평의 가게를 구입했고 장사를 시작한 지 꼭 22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상호도 조일상점에서 대운상사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금은 대부분 되박으로 사갔어요. 그때 가격이 1되박에 3백원 이었는데 그 돈도 없는 사람이 태반인 살기 힘든 시절에 넉넉한 인심을 팔았다”고 회고하는 그는 자못 상기된 표정이다. 새마을 사업이 실시되면서 슬레이트와 시멘트를 판매하였고, 농협이 생기기 전에 조합을 만들어 보은 군내에 비료를 판매하기도 했던, 오직 상인으로만 걸어온 그는 60년 동안의 세월을 한 곳에서 살았다. 그는 3남3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아들과 함께 여전히 소금장사를 하고 있다. 보은의 소금시장을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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