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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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을 찾아서
  • 보은신문
  • 승인 1990.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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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기술 등 고증학적 자료가치 높아
우리는 우리고장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삼년산성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와 배경에는 무엇이 있으며 현재 삼년산성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의문을 곱씹으며 삼년산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제법 무거웠다. 속리산과 상주로 향하는 보은상고의 길목으로 빠져 30분 남짓 걸어 들어가면 숲 속의 오솔길과 더불어 성곽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곳이 보은 어암리에 위치한 삼년산성(사적 제235호, 73년 5월23일 지정)으로 일명 오정산성(烏正山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13년(470)에 축성. 3년만의 공사를 통해 완성한 것이라 삼년산성이라 하는데 3년만의 공사치고는 너무나 방대한 규모라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웅대하고 견고한 석축성벽(石築城壁)으로 구축하였는데 성벽의 높이는 10∼13m, 너비 5∼8m, 성곽둘레 1천6백80m, 면적 6만8천6백27평에 이르고 있다.

이는 당시 인력으로 따져 하루 3천명의 인원이 3년동안 돌을 운반하여 쌓은 셈이다. 이러한 이면에는 삼년산성이 차지하는 위치가 국경 요충지로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접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상주(上州, 현재 尙州)는 신라의 윗고을로 신라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상주로 접어드는 외곽지대인 어암리 오정산에 성을 쌓은 것으로 풀이된다.

또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나하정책에 대비, 처음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해상지점이나 육교의 거점으로 선진국(당시 중국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신라의 위치이다보니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유역과 서해의 중요항구를 쳐서 차지했다. 이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聖王)이 신라를 공격하였다가 삼년산성의 군주(郡主) 고간군도(高干郡都) 부대의 매복기습으로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처럼 삼년산성의 군대는 막강한 신라의 주력부대였을 뿐 아니라 삼녀산성일대는 그당시 처절한 피바다로 얼룩진 역사를 딛고 있다. 이에 대해 이만재(66)씨는 “진흥오아 14년에 법주사를 짓게 된 동기도 삼년산성 일대의 처절한 혈전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잃었고, 일국의 왕(성왕)이 목이 잘린 비운으로 봐서 그 당시 신라 진흥왕이 불교를 숭상하던 때라 속리산에 사찰(寺刹)을 짓게 된 것이 아닌가 본다”며 “요즈음 수학여행을 속리산 법주사만 보고 떠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산 교육장인 삼년산성을 다녀가도록 안내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년산성은 3개 봉우리를 중심으로 선릉이 연결되어 동, 남, 북의 3면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서쪽 1면만이 낮아져 계곡이 된 형국이며, 우리나라 산성의 전통적인 기본형식을 따라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을 이루어 그 성터의 사방이 정사각형을 이루는 듯한 형상이다. 성벽의 기초는 보통의 산성이 산봉우리의 8부능선쯤에 시작하는데 비해 봉우리의 바깥 경사부분에 잡아 쌓아 넓이를 넓게 하고자 하였다. 또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구축하고 협축(夾築)의 공법을 채용하고 있다.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土砂)를 전혀 섞지 않고 내부까지 전체를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그러나 1천4백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바람에 풍화되고 여기저기가 자연스레 허물어져 돌비알을 연상하게 한다. 성벽 전체 둘레중 1천2백m가량이 붕괴, 금년까지 공사를 마치면 1백30m를 복원할 수 있지만 아직도 보수를 필요로 하는 성벽의 길이는 길기만 하다. 삼년산성 보수공사를 맡은 계림건설 김양주(65)소장은 “옛날 성벽돌 하나 하나가 사람이 짊어질 수 있도록 납작하게 되어 있을뿐 아니라 수직에 가까운 석축기법 등에서 도저히 옛날 기술을 따라 잡을 수 없다”며 “국내에서도 이런 기법과 기술의 석축양식은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성안 서편에는 석대삼계(石臺三階)가 있어 상석대(上石臺)에 아미지(蛾眉池)라 조각하였으니 이 각자(刻字)는 신라 김생의 필적이라 전한다. 아미지는 나비 눈썹같은 모양의 연못을 말하며 그동안 흙으로 뒤덮여 연못 구실을 못한다 84년에 준설했다. 특히 삼년산성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문지(門祉)의 형식이 여타의 성벽과 판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 80년 수해로 발견된 서문지(西門祉)는 모든 성곽문이 밖에서 밀거나 성안에서 당기게끔 되어 있으나 이 서문지는 그 반대의 구조로 되어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년산성동우회 김건식 회장은 “서문지 형태의 성문이 발견되기 전엔 일본사람들이 성문에 대해 자랑했지만 삼년산성의 서문지 형태를 보고나서야 말문을 막을 수 있었다”며 “일본인들이 삼년산성의 서문지 구조를 보고 배워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성문을 들어서 중심부쯤 오르면 보은사(報恩寺)가 자리잡고 있는데 옛날 이 자리가 우리고장의 출신인물로서 영의정까지 봉직한 실학의 선각자이며 도학자인 충암 김정(金淨)을 모신 상현서원(象賢書院)터 였다고 한다.

상현서원은 조선 명종때 대시가인 임제(임백호)가 보은 현감으로 내려왔을 때 임금으로부터 받은 사액서원으로 1555년부터 1672년까지 삼년성안에 있다 외속 서원으로 옮겼다. 또 성둘레를 방어하기 위해 곳곳에 치성(雉城)이라 부르는 시설이 있고 성 안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다. 삼년산성에 대해 충북대 차용걸 박물관장은 “고대성곽을 공부하려면 삼년산성은 꼭 알아야 한다”며 “삼년산성은 고대성곽으로 역사적 가치와 기술적 방법등을 고려할 때 고증학적 자료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삼년산성은 역사적 의의와 숨결이 깊은 곳으로 71년부터 조금씩 보수를 해오고 있으나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다. 우리 고장의 이름이 삼년산군으로 시작되었고 사적(史蹟)지로 지정까지 받은 이때에 들어가는 입구 안내표지판도 제대로 없어 삼년산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실례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속리산을 찾는 관광객들도 삼년산성을 둘러 볼 수 있도록 도로의 확대와 포장이 시급한 실정으로 지적되고 있다.

삼년산성을 한바퀴 빙돌아 빠져나오는 마음은 착잡하고 쓸쓸했다. 삼년산성의 돌틉에 피어나는 이끼와 망을 보는 치성의 터 위의 잡초만이 옛날을 그리워하듯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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