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식(삼년산동호회장)
청주보훈지청에서는 금년도 5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우리고장 출신의 정옥모(鄭玉模 : 1924~1989)의사를 선정하였다.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정의사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44년 징병1기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 징집되어 중국에 파병되었으나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소문을 듣고 탈출을 결심하고 행군중 동지 3명과 함께 탈출하여 중국군애 귀순, 유격대에 편입되어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945년 2월 마침내 임시정부 광복군에 들어가 공작반원으로 활약하다가 종전이 되자 일본군 무장해제에 참여한 뒤, 1946년 6월 광복군 일원으로 꿈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이와같은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0여년전 광복절 때다. 정부로부터 내려온 대통령 기념품(당사는 하사품(下賜品) 이라고 함)을 전달하기 위하여 면사무소를 통하여 그분을 알아 보았으나 처음에도 아무도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수소문하여 파악한 바 장날이면 술에 취하여 면사무소에 들어와서는 행패를 부리는 골치 아픈 인물이 바로 정의사라는 것이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에도 오전이었는데 이미 술에 몹시 취해 있었고 기념품을 받으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받자마자 마루위로 던져버리면서 "수고가 많구먼"하는 것이 전부였다. 머쓱해진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 왔으나 초점을 잃은 그의 눈동자는 마냥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내가 그의 행적을 소상하게 알게 된 것은 1993년 군지 편찬때였다. 그리고 '아하! 그거였구나'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는 술을 마실수 밖에 없었다.
그가 일제의 총알받이가 되어 중국대륙에 끌려가 생명을 걸고 탈출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지만 광복된 조국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그가 원하던 광복된 조국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에 빌붙어 민족을 핍박하며 일제 식민정책에 협조하였던 부일(附日)무리들은 몰라도 왜놈보다 더 극성스럽던 친일(親日)분자들은 민족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처단되어야 했고, 일제의 잔재를 깨끗하게 청산한 바탕위에 튼튼한 새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우리의 건국사는 그와는 정반대로 이루어졌고, 반민특위사건으로 오히려 친일분자들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얻은 지위와 부를 바탕으로 다시 민초위에 군림하는 지배계급으로 변해버린 어처구니 없고 굴절된 세상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술아니고 무엇으로 달랠 수 있었단 말인가? 1982년 그의 독립유공이 정부로부터 인정되기까지 귀국하여 36년간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의 공로가 오히려 짐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는 마땅히 광복된 조극에서 비록 배우지 못한 농사꾼이었지만, 그의 공적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면사무소에서 조차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한스러운 세상을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술이 취하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면사무소를 찾아가 울분을 삭여야만 했으며 주정뱅이 취급을 받아가면서 66세의 길지 못한 세월을 살다 홀연히 갔다. 지금 우리는 역사바로세우기가 한참 진행중이다. 지난날 역사 청산이 미흡하여 술과 벗하며 살아가야만 했던 한 독립유공자의 한많던 삶을 되집어보면 굴절된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다짐하여야겠다. 정의사여! 고히 잠드소서.
<생각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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