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오년만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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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오년만의 외출
  • 보은신문
  • 승인 2001.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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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혜 숙(보은농협 내북지소 부녀지도과장)
비개인 하늘의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매미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함초롬히 물기를 머금은 백일홍이 뜨락을 지키는 이맘때면 내겐 너무도 그리운 얼굴이 생각난다. 장대비가 며칠째 계속되던 어느날, 오랜 지병으로 앓아 누우셨던 어머니는 끝내 열세살 막내딸이 안쓰러워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하신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해 여름은 왠 비가 그리도 많이 왔던지… 며칠째 계속 내리 쏟아붓던 은 빗줄기는 장례식 날이 되어서야 멈추었으니, 아마도 마지막 가시는 길이나마 눈물 거두고 가시라는 배려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어머니가 떠나가신지 삼십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난 지금도 이맘때면 늘 가슴 한켠이 그리움으로 아려오곤 한다. 어머니를 잃은후 새어머니를 모시게 되면서 나의 사춘기 시절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원망으로 가득찼으며, 그 누구와도 어울리며 하지 않는 모난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리고는 끝내 학업을 포기한채 스스로 죽음의 길을 찾아 헤매이길 수 차례, 무던히도 가족들의 애를 태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한쪽에 늘 자리잡아 왔던 못다한 공부에 대한 열망은 더해만 갔고, 후회와 가족들에 대한 죄스러움이 가슴을 파고 들었지만 이미 그때는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또한 나 때문에 많이도 눈물 흘리셨던 오빠마저 모두 내곁을 떠나버린 뒤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가슴앓이를 하던중 어느덧 훌쩍 커버린 내 딸아이가 이런 엄마의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이제라도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설움과 회한에 며칠을 울고난뒤 나는 결심했고 딸아이와 함께 약속을 했다.  꼭 다시 시작하겠노라고, 그래서 딸애와 함께 대학엘 진학 하겠노라고…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그리 쉽지많은 않았으나 지난해 11월 15일, 드디어 대학입학 수능시험을 치루기로 작정하고 이른 새벽 고사장으로 들어섰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옷깃으로 얼굴을 가린채 교문을 들어서는 중 수험생을 맞이하던 어린 학생이 반갑게 쫓아나와 차한잔을 건네왔다.

그러나 이내 내 얼굴을 보곤 "아니군요. 죄송합니다"하며 돌아선 순간 나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배정받은 고사실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야 했다. 쿵닥거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교실을 둘러보니 모두 딸아이의 또래 이었고 아이들은 흘낏, 흘낏 나를 훔쳐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험을 치루고, 입학원서를 내고, 지난 3월 그토록 열망해 왔던 대학엘 입학하게 되었으며 학생증을 받아들고는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목 놓아 울었다.

비록 남들에겐 하찮은 것일지 모르나 내겐 너무도 오랜세월 가슴 한쪽에 자리잡아 왔던 아픔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다른 것이었다. 퇴근후 학교를 향하는 발길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으며,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올수 있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윗덩이를 들어낸것 같은 홀가분함이랄까? 비록 자식 또래의 아이들과 컴퓨터학문을 익히려니 그 어려움이야 이루 말할수 없지만, 나를 곁에서 여러모로 배려해주고 도와준 직장 및 가족, 그리고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든 욕심으로 최선을 다해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나처럼 오랜 세월 가슴앓이를 하는 이웃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철부지 마음으로 한창 공부할 나이에 방황하고 있는 어린 청소년들도 있으리가 생각한다. 나는 이 모든 이웃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하고자 하는 일을 접어두고 가슴앓이 하고 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라고, 그것이 비롯 무엇일지라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 글귀를 함께 전해주고 싶다. 꿈을 품고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순어 있다.』- J.W 괴테-

이십오년만의 나의 외출이 결코 헛되지 않은 길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함께 그 분들께 용기를 드리고 싶다.

<정이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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