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산불과 수기안토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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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산불과 수기안토의 경우
  • 양승윤 (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5.06.12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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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 대사를 역임한 국립싱가포르대학교의 팡엥홍(Pang Eng Fong) 교수는 우리나라 산에 매료된 분이었다. 어디에나 산이 있고 지하철로 쉽게 등산로 입구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정상까지는 아무에게나 허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 대학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주말마다 서울 주변의 이름난 산을 모두 올랐다며, 남산과 북한산이 제일 좋다고 했다. 팡 대사는 한국의 산은 모두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정상까지 오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며, 산마다 나무가 많고 바위가 많고 계곡이 많고 등산객이 많다고 했다. 지한 인사인 그는 서울 재임 기간 내내 벤츠 대신 국산 소나타를 애용하였다. 
   한반도의 70%는 산지라고 했다. 그만큼 산이 많다. 산에는 나무가 많고, 가을 되면 낙엽이 쌓이고 겨우내 북풍으로 건조해지면, 봄철에 쉽게 산불로 이어진다. 탈북자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 남한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산에 나무가 많다’는 것이었다. 북한에는 땔감을 생활 주변에서 채취하기 때문에 보이는 산마다 민둥산이라고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는데, 1960년대 중반께부터 연탄이 보편화 되고부터 나무 땔감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 이전에는 소나무 바늘잎까지 박박 긁어다 밥을 지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국의 80% 가량이 연탄을 사용했고, 90년대 이후 석유와 전기보일러가 등장하면서 나무 땔감이 사라지게 되었다. 
   벌써 여러 해 전이다. 강원도 동해안 쪽 휴전선 인근에서 산불이 크게 났을 때, 영국의 유력한 군사저널 <디펜스>는 한반도의 남북 분계선에서 발생하는 대형 산불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한다. 인도네시아 밀림에서도 자주 산불이 발생한다. 낙엽이 오랜 세월 쌓여서 토탄(土炭)층이 형성되고, 그 위에 밀림에 사는 소수종족들이 화전(火田)을 일구면서 산불로 번진다. 수마트라나 칼리만딴(보르네오)에서 산불이 나면, 인근의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는 비상이 걸린다. 숨쉬기가 어려운 매캐한 연기 때문이다. 필자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사흘 동안 호텔에 갇혀 지낸 경험이 있다.
   우리는 지금 남의 나라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봄철 산불을 정책 입안자들은 ‘엉거주춤’하고 계곡에 무릎 빠지게 쌓이는 낙엽만 바라보고 있는 형색이다. 지난 3-4월의 산불이 역대 최악의 산불이라고 한다. 헬기 조종사와 공무원 등 31명이 목숨을 잃고 45명이 크게 다쳤다. 5개 시군(市郡)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는데, 이 지역의 피해 면적이 104,000헥타르라는 발표가 있었다. 경상북도는 국비에 지자체 예산 6,000억을 포함하여 총 1조 8,310억 원을 피해복구 예산으로 확정하였다. 숲이 불타고 마을이 사라지고, 가축이 떼죽음을 당하고, 농작물이 잿더미에 묻혔다. 이재민이 3만 7천 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초대형 재난 때마다 많은 희생을 딛고 영웅들이 등장하여 미담(美談)을 남긴다. 인도네시아 청년 수기안토(Sugianto)도 그중 하나다. 중부 쟈바 북부 해안도시 바뉴마스에 아내와 아들 하나 두고 있는 그는 8년째 영덕군 축산항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다. 우리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수기안토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동네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힌두불교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는 쟈바 이슬람사회는 개인 일보다 동네일을 우선한다.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동네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두 나서는 돕는 문화다. 조금 과장하자면, 당사자는 문병 인사나 조문만 받으면 된다. 비협조자들은 ‘죽어서 자신의 관(棺)을 메고 갈 사람’이 된다. 수기안토도 31년을 쟈바문화의 바탕에서 성장했다. 
   지난 3월 22일 의성군 일대를 태운 산불이 강풍을 타고 뜨겁고 매캐한 연기가 영덕군으로 넘어와서 축산항 인근까지 밀려들었다. 이때가 밤 11시. 수기안토와 동네 이장은 집집마다 뛰어다니면서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 노인들을 깨웠다. 수기안토는 이들을 업고 축산항 방파제 인근 대피 장소까지 300m 거리를 달려 7명의 생명을 구해 냈다. 정전으로 온 동네가 캄캄하고 모든 통신이 끊겼는데도 몇 컷의 극적인 장면이 핸드폰 카메라에 잡혀서 언론에 알려졌다. 4월 23일 포스코청암재단은 수기안토를 포스코히어로즈로 선정하여 큰 선물을 안겨주었고, 법무부는 이에 앞서 4월 18일 수기안토 등 3명을 표창하고 장기거류비자(F-2)를 내주었다. 이 공식행사에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와 필자가 하객으로 초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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