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노루를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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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노루를 사랑하셨다
  • 김옥란 (속리산 비로산장)
  • 승인 2021.05.06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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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가보니 숲가에 노루 세 마리가 있었다. 이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한가로운 봄날 저녁에 밥 먹으러 내려온 것일까? 이 노루들은 우리 앞에 너무도 가까이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커다란 노루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저만큼 있는 작은 노루는 먹이를 찾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엄마 노루는 초연한 모습이었다. 엄마 노루의 그 눈빛과 표정에서
 “산다는 일은 쉽지 않아. 4월이 되었는데도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으니”하는 것 같은 깊은 속내가 읽혀졌다. 그러고 보니 이번 1월 어느 몹시 추운 날 밤에 우리 가족이 폭설이 쌓인 산길을 걷다 마주친 세 마리 짐승이 아마도 오늘 본 이들 노루 가족 같았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 산골짜기를 들썩이며 포효하던 호랑이 소리에 내가 아버지 품으로 달려들어 안기며 “아빠, 저기 호랑이 울어. 호랑이 울어.”라며 바들바들 떨며 울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노루 소리야. 노루가 우는 소리야. 괜찮아” 하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토닥토닥 나를 달래셨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게 되었다. 노루는 이때부터 나에게 착한 숲속 동무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노루가 우는 소리라며 어린 딸을 안심시키던 젊은 아버지. 그 아버지는 늙어 어느덧 돌아가시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 어느 날, 아버지 병상 옆에서 내가 갑자기 재채기를 아주 크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편찮으신 아버지께 죄송스러웠다. “아이쿠, 깜짝이야. 저 앞산에 있는 노루가 놀라겠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이러한 반응에 나는 또 노루가 생각났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는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우산이 되어주시고, 하늘이 되어주셨던 우리 아버지. 나의 재채기 소리에 앞산에 있는 노루가 놀라겠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작은 목소리에는 저 앞산의 노루라는 자연을 끌어들이시는 여유와 인간미와 해학도 담겨있는 것 같았다. 자연 속의 모든 것을 존중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속리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노루가 놀라겠다>라는 말씀 속에 묻어있는 것 같았다. 노루는 속리산 산속의 모든 자연을 함축한 의미이지 않을까? 아무튼, 올해 나는 아버지가 나의 재채기 소리에 노루가 놀라겠다고 하시던 속리산의 그 노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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