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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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향기
  • 오계자 소설가
  • 승인 2020.05.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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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처럼 잦아든 맥놀이에 에워싸인 듯 몽롱하다. 새벽잠을 깨운 감각이 청각인지 촉각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에게 스며들어 깨우긴 깨웠다. 맥놀이를 연상했다면 아마 소리가 아닐까. 어쩌면 봄의 혼이 장난삼아 나를 건드려 오감이 다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봄은 봄인가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양치하러 가다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참 우습다. 잠을 깨운 주범이 새벽녘 기온이 떨어지니까 자동으로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였다. 혼자서 계면쩍게 볼웃음을 머금는다. 어차피 다시 잠들기는 어렵고 하루를 시작하기위해 앞치마를 들다가 또 센티멘털 해졌다. 낡아서 너덜너덜한 앞치마의 모양새가 밉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이 간다. 둬 군데 있던 구멍이 이제 제법 여러 군데가 되었다. 어제는 세탁기에 넣지 못하고 손으로 주물러 목욕을 시키면서, 삶의 뒷자락까지 함께한 30년 세월을 되새겨 보았다. 어쩌면 생의 마무리까지 함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살살 쓰다듬어 본다. 내 삶의 향이요 정이다. 가슴과 배를 보듬어 감싸는 구멍 난 앞치마에서 아득한 그리움이 안개처럼 피어난다. 같이 피어나는 대상 없는 막연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느릿느릿 텃밭으로 나가 흙과 햇살을 맞이한다. 정이란 게 참으로 은근하고 끈끈하다. 낡은 앞치마가 내 삶의 역사요 향기며 추억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말이다.
올 봄은 다행스럽게 컨디션도 좋고,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행사는 물론 작지만 소일거리인 일터도 문을 닫은 덕분에 매일 몇 가지씩 묘목을 사다가 텃밭 둘레에 심는 재미가 행복을 준다. 행복감은 피곤함도 삼켜버린다. 일과를 마치고 욕실로 가기 전 앞치마를 벗다가 또 잠시 소중한 보물처럼 만지작거린다. 30년 전 어머님 회갑잔치를 앞두고 나와 만난 앞치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하다 보니 내 눈물 콧물 다 받아주던 앞치마다. 이제 남은 생에 닦아야할 눈물도 콧물도 없고 웃음만 남았는데 이 녀석은 그만 너덜너덜 하다. 누군가는 까짓 낡은 앞치마 하나에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강산이 세 번 변하도록 함께 한, 내 삶의 향기를 지닌 정 보따리다. 일상에 늘 쓰는 물건들도 유난히 정이 가는 도구가 있고 긴 시간을 함께 해도 설기만 하는 도구가 있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 하면서도 정이 스며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유를 모른 채 오는 정을 거부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겠지만 더러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준 거 없이 밉다.’고 하는가싶다. 누군가 내가 주는 정을 거부 했을 때, 그것은 오해의 결과다. 소통 부족이다. 그 사람에게 마음이 전달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해석을 하니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내가 덜 익어서 아직 설 때, 새긴 미움도 원망도 이젠 다 내려놓았다. 퍽 질기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기도하며 끊었다. 이제는 오히려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상대가 안쓰럽다. 미움과 원망은 받는 쪽 보다 원망을 품은 쪽이 괴롭고 고통인 것을. 어느 신부님 말씀이 생각난다. “단 1초라도 내 마음 빼앗기지 마세요. 원망하는 시간이 1초라면 그 1초 동안 마음을 미운사람에게 빼앗기는 겁니다.” 그 말씀을 늘 거울로 삼는다.  
담 넘어 가로등이 더 밝아지는 이슥한 밤이건만 뒷산 숲에도 나처럼 잠 못 들고 뒤채는 생명의 소리가 있다. 불을 켜고 그이의 사진을 바라보며 앞치마를 보여줬다. “봐유, 육거리 시장에 같이 갔을 때 당신이 골라 준 장미꽃 무늬 앞치마유, 이제 너덜너덜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요것이 너덜너덜 해질수록 내 마음은 편해 지네유, 세월은 내편이네요. 나는 이제 겨우 세상 보는 눈을 떴는데 어찌 그리도 성급하게 서둘러 가셨어요. 다음 주 어머님 생신이라 생신 메뉴 짜다 보니 더 당신 생각이 나고 이 앞치마도 더 의미가 생겨요. 오늘따라 보고 싶네요.”
잠시 눈가를 닦으며 감성에 젖어 있던 중, 뒷골 절에서 새벽 종소리가 적요를 깨고 제대로 맥놀이 되어 너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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