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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우스
[1429호] 2019년 05월 30일 (목) 박태린(한음클라리넷오게스트라단원) webmaster@boeuni.com

몇 일 전, 아침에 일어나니 단비가 내리기에 심을까말까 여러 번 고민하던, 옥수수 모종을 구입해서 화단 과 텃밭 한켠에 심었다. 우비를 입은 등에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쉬임없이 떠오르는 이야기들, 그 사연까지 흙 속에 꼭꼭 채워 넣었다. 막내 여동생의 유별난 옥수수 사랑에 휩쓸려서 먹곤 했던 옥수수가, 추억이라는 이름과 함께 심어졌다.
 바쁜 시간들 살아오면서 꿈을 꾸곤 했다. 한가한 시간 마음껏 누리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계획에 없었던 뜻밖의 일이 생겨 마음에 한 줄기 빛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4월말부터 5월 초순까지 이어졌던 이천과 여주의 도자기 축제에 여중고를 같이 다닌 친구 홍은숙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기에 서둘러 올라갔다. 도자기에 씌여진 시 <산수유>에는 감성 충만한 글에 윤회(輪廻)의 의미가 들어 있어 시공(時空)을 초월한 깊은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고 있는 내면의 그녀를 글로 읽으면서 나는 뿌듯한 기쁨에 잠겼다.
 여주에서 두 군데의 주유소를 운영하는 홍작가는 배포 또한 대단한데 10여 년 전 우리나라 4대 일간지를 도배했던 정유(精油)사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주인공과 거래를 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녀 역시 당연히 검찰로부터 소환장이 날라 왔다.
 주유소 거래 장부를 들고 소환되던 날 아침에도 수배자의 전화를 받았던 그녀는, 검거에 도움을 달라는 수사관의 말에 “당신들에게는 범죄자 이지만 내게는 친구였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고, 기쁨을 준 멋진 사람이었다. 또한 나는 그와의 거래에서 아무런 혐의가 없음도 입증이 되었고, 그러기에 나는 그의 체포를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라고 당당?하게 거절을 해서 수사관과 주변인을 경악시킨 일이 있었다. 후에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은 수사관은 그녀의 팬이 되었고, 경제사범 역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여주에서 6일을 지내던 어느 날, 홍작가와 예술인들이 모여 여주와 원주의 경계령인 산 속 별장에서 이틀을 지내게 되었다. 2층 실내 입구에는, 무대처럼 만들어진 아담한 실외 데크가 있었다.
 구름에 가려 달도 보이지 않는 밤, 맞은편 음성 쪽엔 검푸른 하늘 아래 오갑산(梧甲山)이 검은 모습으로 우리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발코니 아래는 오랜 세월을 견딘 소나무들이 조용히 서 있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마치 흑백 물감의 농도를 잘 못 맞춰 원근(遠近)구분이 확실치 않은 초보자가 그린 수묵화 같았다. 그러나 서툰 그림 속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 모두들 잠시 말을 잊었다. 와아~!♥
 이럴 때 분위기 상승효과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검색. 패티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 등등 팝송과 샹송이 튀어 나오고 ‘나타샤의 왈츠’ 연주가 흐르면서부터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지난 날의 그리움에 눈은 감겨지고 귀는 크게 열린다. 그뿐 아니지, 심장의 템포도 빨라지고 마음도 따라서 열렸겠지?^.^ 
  낮이면 초록이 온 세상을 휘감는 눈부신 5월 중순인데 ‘눈이 내리네’를 듣다니 ...ㅎ. 그것은 사계(四季)와 무관하게 지난날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나이 탓일 게다.
  나는 가만히 가장 사랑하는 성가(聖歌)<엠마우스 Emmaus>를 불렀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훗날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그리워하는 날이 오게 되겠지. 그러나 이번에 신이 허락한 시간이 이뿐이라면 더 이상의 미련은 갖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받았을 것이니까.
 상업미술을 전공한 막내 여동생은 재학시절 내내 하루 두 시간씩 서실에 가서 글씨를 썼고 두 시간씩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어느 날, 친정집 거실에는 동생의 서예작품인지 좋은 글 한 폭이 걸려 있었는데 마지막 문장은 지금까지 내 삶의 철학이 되어 있다. “오는 것을 거절치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일이 지나갔음에 원망하지 말라” 
 아낌없이 심어 놓은 내 추억과 함께 자란 옥수수를 딸 때쯤이면, 조용히 나를 돌아보며 생각할수 있도록 한가한 시간을 주신 신에게 두 손 모아 깊은 감사를 드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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