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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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9.02.2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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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자연인”프로가 인기였다. 기성세대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텔레비전 뉴스에도 관심이 멀어져 갔다. “자연인”프로에 관심이 쏟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옛 드라마 재생판에서 그리움을 달래던 사람들도 방영 중간에 불쑥 튀어나온 보험선전에는 묵음으로 전환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자연인” 프로도 처음에는 소박한 무소유에 대한 정감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흔한 것이 자연인 프로다. 더구나 도시 아파트같은 내실을 꾸미고 사는 세속화된 “자연인”프로를 보고는 “저게 자연인인가?”하고. 또, 먹는 것만 자꾸 보여주니 “또 먹는거냐?”고 지겨워진다. “자연인”이라는 만들어진 단어와 소박한 “자연인”에 대한 환상적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인가?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간 이야기다. 내가 카나리아군도 분화구에서 본 스페인산 자연인의 모습은 글자그대로 소박한 무소유인 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남부지방 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저 아래로 목화조각 같은 새하얀 구름들만 떠있고, 새파란 바다에 비친 그 구름의 그림자와 어울려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 가운에 있는 “그란 카나리아”섬의 “라스팔마스” 공항에 도착했다. 체재한지 며칠후 어느날 새벽에 일찍 잠이 깨어있을 때였다. 밖에서 갑자기 “야-베, 야-베”(열쇄, 열쇄) 하는 급박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한 불록 저쪽 길에서 재빠르게 도망을 가는 한 남자와 그 뒤를 따라가면서 외치는 여자가 있었다. 도망자가 야자수 저쪽으로 자취를 감추자 여자는 곧 주저서고 말았다. 새벽 산책객의 여권과 돈지갑이 “털치기”들의 목표다. 한국여권도 고가로 팔린다고 들었다. 그런 새벽을 뒤로하고 우리는 분화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화구는 깊고 경사도 급했고 분지의 모든 경사면은 온통 콩알만한 화산재로 잔뜩 덮여있었다. 짐승길 폭에 구불구불하게 나 있지만 수시로 화산재가 흘러 내리는 통에 길이 없어진 곳도 있었다. 미끄러지면서 간신히 바닥에 이르니 조그만 집 한 채가 있었고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이 나왔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직접 담았다는 선인장술을 내 놓았다. “아구스틴 에르난데스 또레”씨는 그곳이 좋아서 40년전에 들어왔다고 했다. 형제가 3녀 5남이지만 만나지 못하고 부모들은 필리핀으로 갔는데 아마 다 죽었을 거라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아무 병 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집을 나와서 분지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관목에 ‘노빨’과 같은 선인장류가 대부분이고 주위는 적막뿐이었다. “무주공산”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무슨 소리라도 듣고 싶어도 가망없고 조용히 귓전을 간지럽히는 미풍뿐이었다. 사교적인 사람들은 심심해서 단 한시간도 못버티고 죽어버릴 그런 분위기였다. 한바퀴 돌고 “또레”씨 집으로 걸어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움직일 때만 들리는 저 소리는 분명 우리를 미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숨바꼭질 끝에 저 뒤에 서 있는 당나귀 한 마리를 보았다. 바로 저놈이었구나! 그곳 당나귀도 너무 외로워서 우리를 따라왔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또레”씨에게 뭐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으니 윗동네 가게집에 맥주 두병만 사놓고 가면 올라가서 먹겠다고 했다. 우리는 “빠꼬레스토랑”에서 맥주 한박스를 사서 “또레”노인이 오면 주라고 했다. 덧붙여 “또레”의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더니 70세가 넘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다며 가족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고무친에 당나귀 한 마리와 함께 분화구 속에서 외롭게(?) 남아있던 자연인 “빠꼬” 노인이 아직도 살아있을까 궁금해진다. 자기 부모는 필리핀에 갔고 아마 죽었을 거라고 담담히 말하던 그 인정 없는 노인처럼 나도 같은 말 밖에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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