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국인 운전사가 준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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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외국인 운전사가 준 감동
  • 보은신문
  • 승인 1998.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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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국(충북도 공무원교육원장)
몇 해전 일본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우리 일행 십여 명이 일본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동경 주변의 명승지를 시찰할 계획이었다. 여행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으므로 다소 들뜬 기분으로 호텔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나이가 지긋하고 머리가 희끝한 운전사가 버스 출입문 앞에 서서 다소곳이 인사를 하더니 신발을 벗고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발이 다소 지저분하기는 했으나 벗고 타야 할만큼 더럽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의아심은 도를 넘어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평소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은데다가 우리를 깔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손짓 발짓으로 그 운전사에게 항의하며 심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일행중 몇 사람은 이 차를 못타면 못 탔지 신발을 벗고 타지는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일부에서는 일단 운전사가 하라는 대로하고 나중에 따져 보자는 의견이었다.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일단 신발을 벗고 차에 오르기로 했다.

그 운전사는 우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그레 웃으면서 어서 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 때부터 였다. 맨 앞사람이 차에 오르려고 신발을 벗자 그 운전사는 그 신발이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한 후 신발장에 넣는 것이었다.

게다가 버스안은 여느 가정집의 응접실처럼 가운데 탁자가 있고 창가쪽으로 안락한 소파를 둥그렇게 배치했으며 외부의 경치를 편안히 앉아서 볼 수 있도록 첨단영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여행에 필요한 지도가 탁자 위에 정돈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비상약품이며 조그만 냉장고에 시원한 음료수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자기집 거실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제야 신발을 벗고 타 줄 것을 권한 운전사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운전사는 조금 전의 실랑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싱글벙글 거리며 그 날의 일정과 코스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여 첫 행선지에 도착했다. 운전사는 버스를 안전하게 주차시킨 후 자신이 먼저 차에서 내려 우리가 벗어 놓은 신발을 챙겨 주었는데 어느새 신발과 사람 얼굴을 기억했는지 몇몇을 빼고는 거의 그 사람의 신발을 맞게 찾아 주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에는 마치 집주인을 배웅하는 것처럼 일일이 정중하게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관광을 마친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로 돌아오면 그는 출입문 앞에 서서 두손을 모으고 정중히 우리를 맞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실내를 깨끗이 정돈해 주곤 했다. 여행지 주변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손님에 대한 그의 배려는 세심하면서도 정성스러웠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발을 벗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일들이 차츰 부끄러워 졌다.

나이 오십을 훨씬 넘긴 주름진 얼굴, 그러나 진솔하면서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차츰 우리를 감동시켜 가고 있었다. 하루 일정이 모두 끝나고 호텔로 돌아와 작별할 즈음 우리 일행은 아침의 일을 사과하고 그의 친절에 보답하는 뜻으로 얼마간의 팁을 전달하기로 하고 그를 불렀다. 우리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봉투를 내밀자 그는 정색을 하며 마음만으로도 고마우니 절대 받지 않겠다고 사양을 했다.

오히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한번 찾아 줄 것을 부탁하며 총총히 사라졌다. 그후 몇 년이 지났건만 나는 그 운전사를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거친 항의와 불쾌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우리를 감동시켰던 그 왜소한 일본인, 자기가 맡은 일에 긍지를 갖고 자신의 일을 즐기던 그 아름다운 모습, 우리가 건네준 팁을 끝내 거절하던 당당한 어깨, 나는 그에게서 진정한 전문 직업인, 즉 프로로서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자기가 맡은 분야의 최고 전문가, 그러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 오로지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그것을 통해 생의 보람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곧 프로인 것이다. 그때 나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그 운전사는 지금도 내 가슴에 사로 남아 나를 채찍질하고 있다.

<정이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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