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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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
  • 보은신문
  • 승인 1998.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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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보은 문학회원)
지난 가을부터 미뤄왔던 도배와 장판을 시공하기로 하였다. 육년이 넘도록 바꾸지 못한 벽지와 장판은 군데군데 얼룩이 지고 찢겨져서 겨울이 지나자 더욱 칙칙해 보인다. 온 살림을 다 들추어내자면 예삿일은 아니지만 구석구석 손도 대지 못한 대청소도 할겸 날짜를 정했다. 우선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쌓인 먼지부터 털어내야 했다. 틀별하지 않은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데도 왜 그리 소용되는 물건이 많은지 무엇을 버리고 또 챙겨야 할지 혼란스럽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세상과 복잡하게 얽혀드는 연결고리 또한 늘어나지만 쉽게 버릴 수가 없다. 모두의 생활에 물질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허기를 느끼는 의식은 서둘러 그 빈곳을 채우려 한다. 지금보다 더 여유로왔던 내의식의 여백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었을까! 지금의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참으로 허술한 집에서 살았다. 쥐와 고양이가 극성을 부리고 대식구가 생활하기에 불편함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추위가 문제였다.

겨울이면 방안에 연탄난로를 피우면서 가스 때문에 늘 마음 졸이며 따뜻한 봄이 오기를 얼마나 염원했는지 모른다. 다른 여건도 함께 어려웠으니 좀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채 오지않는 봄을 성급히 기다리곤 하였다. 포근한 봄 햇살은 나에게 적잖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막연한 희망이라도 잉태시켜 허허로운 마음에 위로가 되기도 하였다. 성실히 흐른 시간속에서 다행히 모든 조건들이 나아지고 새집을 짓고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로서는 궁전이라도 얻은 듯 기쁨이 컷고 그 편안함과 따뜻함에 풋풋하던 감성까지 슬그머니 눌러앉아 계절의 변화에도 무감감해졌다. 예전처럼 설레며 봄을 기다리지도 않고 따스한 봄 햇살에 느끼던 감사함도 잊고 살았다. 아이들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둑길따라 봄을 맞이하러 가던 일도 그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넓던 집이 시간이 흐르자 좁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내부구조도 불편한 곳이 두드러진다.

부풀어지는 욕심을 걷어내야 지난날의 어려웠던 기억도 함께 자리해 더 오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계획으로는 더럽혀진 벽지를 바꾸는 이번 기회에 방안의 옷장도 바꾸어 볼까 생각했었다. 여러번의 이사와 마구 다룬 탓인지 농이 성치않다 헌데 시국 역시 더 성치 않아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썩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조심성도 없는편이다(큰딸 아이가 “썩”이라는 글자는 빼야한다고 넌지시 일러주었지만)이래 저래 좋은 그릇이나 손길이 많이 필요한 화려한 장식품이나 가구는 크게 연연 할 수가 없다.

가계부의 부담을 극복했다 치더라도 흠이라도 날까 정성을 기울여야하고 매일같이 윤이나도록 쓸고 닦아주어야 하는 것이 내게는 구속처럼 느껴진다. 손끝이 야무지게 살림하는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흠모하지만 난 내 개성을 쫓아 좀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식성은 물론 취미생활이나 실내 장식까지도 유행따라 바뀌는 주위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좀 답답해 보이지만 한발 늦더라도 초조해하지 않는 그런 나의 주관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즈음 우리가 누렸던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많다. 소중한 것들을 얼마나 더 내주어야 할지, 희망은 너무 사치스럽고 용기와 인내마저도 다 거덜나지 않을까 두렵다.

<정이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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