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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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을 메고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7.06.2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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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의 푸르름이 온 누리에 충만하던 5월말쯤 산행을 다녀왔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연화봉 산철쭉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말 느닷없이 자신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소백산 산행의 하루였다.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한 마을 뒷산과 근교 야산에만 간간히 오르던 나로서는, 등산이 3시간, 하산이 2시간이라는 동행자의 말에 초입부터 주눅이 들었다. 몸은 노화해도 마음만은 아직이라는 오기와 자연과의 씨름을 감행하겠다는 당돌함이 배합된 산행이었다. 나뭇잎들은 찬란한 오월의 햇살에 마냥 살랑거리고, 울창한 숲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하늘이 마음의 창으로 들어온다. 반 정도도 못 오른 깔딱고개에 이르자 정말 할딱거리기 시작하였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씻으며 오이와 물을 꺼냈다. 당겨오는 다리 근육과 중단 없는 씨름을 할 것인지, 내리막길을 선택하여 편한 본거지로 귀환을 할 것인지의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앞에서 묵묵히 올라가는 동행자를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여긴가 싶으면 다시 저만큼 물러나 손짓하는 우주의 오아시스 하늘이여!’를 외치며... 오월의 태양과 끊임없는 실랑이를 벌이며 오르고 또 올랐다. 드디어 산철쭉 나무들이 서서히 모습을 보였으나 꽃잎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어진 채 길을 물들였다. 그 때 바위 뒤에서 산신처럼 나타나며 하행하는 두 사람을 붙잡고 간곡히 물었다 “얼마나 더 올라야 산철쭉이 보이는지요?”“ 네, 천국이 바로 문턱에 닿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돌연히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가 내 몸을 천근만근 붙잡아 매면서 가슴이 들먹이기 시작하였다. 기어코 동행자의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아 쥐면서 <여명이 오기전이 가장 어둡다> 란 말을 생각하라고 일러준다. ‘맞다.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도 정말 그러지 않았는가! 칠흑같은 어둠이 걷히면 새벽이 바로 오듯이, 내리막길로 나뒹굴어 신음할 적마다 다시 고요한 평화의 언덕을 예비해 주신 여호와가 계시지 않았는가!’나는 진력을 다해 산철쭉 나무 둥치를 두 팔로 안고 다리에 마지막 힘을 가했다.
와, 우와! 정상이다! <소백산 연화봉> 돌판이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내 발 아래서 온 천지가 찬양을 하며 우러러 보고, 둘레 길에서는 연분홍 산철쭉 아씨들이 화들짝 웃으며 박수를 보낸다. ‘화향천리행(花香千里行)이라더니 마지막 향내를 발산하며 고요히 낙화하는 연화봉 산철쭉이여!’를 읊조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무들 사이로 웅웅거리며 배회하는 바람소리에 꽃은 사뭇 흔들리는 중이었다. 때 아닌 오월에 연분홍 우박이 눈물처럼 뚝 뚝 내리는 중이었다. ‘만개의 시기를 놓친지라 각오는 하였지만 가는 봄이 아쉬운 것이 어찌 너 뿐이랴....’ 조지훈 시인님의 ‘낙화’를 암송하며 산철쭉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요기를 하였다. 삶의 단잠을 깨어보니 모두가 헛되고 헛된 한바탕 꿈속이 아니겠냐고...꽃잎은 이젠 더 보여줄게 아무것도 없다며 풍장을 치르고 있었다. 세월은 살아 온 게 아니라 꿈결처럼 지나가는 저 바람소리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눈앞에는 또 하나의 정상 비로봉이 <도피안 공지혜>를 가르치며 우뚝 서 있고,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가르침이 연화봉 바람소리에 묻혀서 웅얼댄다. ‘그렇다! 행복과 평화는 비움이다. 버림이다. 인생은 가식을 버린 진솔함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연화봉 정상까지 올라온 것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내 삶의 배낭의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무거울까를 생각하며 다시 빈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리고‘4막4장쯤 될 나의 여정 길에서 과연 무거운 삶의 찌꺼기를 다 쏟아내고 텅 빈 배낭을 남길 수는 있을까?’를 자문하면서 하산을 서둘렀다. 나의 봄은 가고 안 오겠지만, 해마다 연화봉 산철쭉은 수많은 사람들을 정상으로 불러올릴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연분홍 우박을 분분히 날리면서 <비움의 철학>을 툭 던져줄 것이 분명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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