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를 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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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뿌리며...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7.04.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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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봄이 더디고 더딘 라르고 걸음으로 찾아오는가 싶더니, 4월이 열리자마자 연하디 연한 연둣빛 물결을 타고서, 때로는 부산스런 바람기에 실려 춤을 추며 성큼 다가왔었다. 산수유와 복수초, 제비꽃이 방긋이 웃으며 계절의 문을 열어 제치자, 가지가지 꽃들이 눈웃음을 치며 우리를 손짓하였다. 연다라 홍매화, 살구꽃, 백목련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혹의 미소를 날리고, 산야에서는 진달래, 복숭아꽃 산 벚꽃들이 처연히 피어났다. 봄바람에 연둣빛 치맛자락을 리드미컬하게 휘날리는 버드나무는 설레임의 도가니 속으로 우리를 오라한다. 마치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이 시도 때도 잊은 초여름 꽃까지 바톤을 이어받으며 봄은 어느새 중반 기점을 넘어섰다. 얼마나 마음이 산란스럽게 요동쳤으면 ‘차라리 저 꽃 빨리 떨어져 버렸으면....’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생겼을까!
이다지도 서두르며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바람에 계절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벌써 겉옷을 벗어재끼며 그늘로 숨어들고 있다. 나도 이러한 봄의 축제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겨우내 구석에 숨어있던 잔잔한 꽃씨들을 안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상상화를 그리듯이, 정물화를 그리듯이 연출을 시도해 본다. 작년보다 안성맞춤 제 자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여기저기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고 물도 뿌려준다. 내일에 충만한 꽃들을 피우기 위해 지금 이렇게 꽃씨를 뿌리는 일은 또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작업인가? 성경에 사람의 심령을 세가지 밭에 비유한 구절처럼 말이다.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면 새가 와서 먹어치우고, 돌밭에 떨어지면 뿌리가 자리를 못 잡으며, 가시밭에 떨어지면 가시 때문에 자랄 수 없음이다. 그러니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씨앗만이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거두느니라’고 말씀하듯이 말이다.
나는 오늘 꽃밭 연출을 하며 씨앗들과 한나절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모태의 대지 그 오랜 잠에서 깨어나 얼릉 싹을 틔우라고, 때로는 억센 바람이 불어와도 목에 힘을 주고 피를 삼키듯이 습기를 빨아 혼신을 다해 살아남으라고, 신열을 곰삭이며 살을 째는 통증쯤은 필히 감내해야만, 네 아픈 목에 축복처럼 한송이 꽃봉오리가 돋아날 거라며... 그렇게 몸살을 앓으며 화려한 울음 한바가지 쏟아 내야만 이 계절의 지존이 될 거라며... 그러한 고난이 없이는 이 봄날이 그리 쉽사리 가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인생도 연출이다. 누구나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은 자신의 연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세상에 나와서 목바라기 시작한 아가에게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기원하듯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세상의 풍파와 고난과 어려움에도 꺾이지 말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나길 바라듯이, 아픔과 고난이 없는 안락한 삶에만 안주하지 말라고 당부해야 할 것이다. 무릎 꿇어 눈물 뿌리는 기도제목이 없이는 그 어느 경지에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의 진부한 이치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사람을 양육한다는 것은 마치 좋은 땅에 정성을 다하여 꽃씨를 뿌리거나 꽃묘를 심는 일과 같지 않을까?
나도 이렇게 꽃씨를 뿌리고 나니 내 무의식의 밭에서 잠자고 있던 감각기관이 슬며시 깨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아마도 늦게서야 도착한 제2의 인생을 경작하고 연출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신념에 부풀어 있는지도 모른다. 불모지 같은 내 마음 밭에도 봄 이야기가 참으로 붉게 피어날 것 같은 예감이다. 내 전두엽 어딘가에 숨었다가 이토록 가슴이 터질듯이 불러보는 봄의 연가인지 나도 참 모를 일이다. 그 옛날 소녀시절 순전한 가슴에 흐르던 따스한 강물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영혼의 샘물로 변해 다시 펑펑 솟아나기를 고대해 본다.
오늘은 종일토록 봄비가 내린다. 온 천지에 꽃비가 내린다. 정성들여 연출한 꽃밭위로 백목련 꽃송이들이 학처럼 훨훨 날고 있다. 살구꽃 매화꽃 복사꽃잎도 풍장을 치르느라 종일토록 분주하기만 하다. 고목에도 피어나는 꽃바람, 삭정이에도 이는 잎바람이 취한듯이 4월을 낚고 있으니... 임 찾아 가는 길에 잠시 들려준 봄 처녀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아 보자. 그리고 이 붉은 봄이 가더라도 저만치서 달려오는 오월의 문을 힘차게 열고 나아갈 때다. 우주와 통하는 문을 활짝 열고 초원의 빛을 닮은 하늬바람을 안아보자. 우리 모두 다시 싱그러운 연둣빛 꿈을 꾸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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