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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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에게!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7.03.2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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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대문 구멍으로 부산스레 들락거리는 봄바람 소리가 창문을 흔들어댄다. 거실 창문을 가만히 밀치자 봄바람 등을 타고 노니던 봄 햇살이 쪼르르 들어와 앉으니, 겨우 내내 창가에서 졸고 있던 화초들이 화들짝 깨어나 살랑거렸다. 어깨에 메었던 배낭을 내려놓고 두 다리 쭉 뻗으며 소나무 등걸에 기대었던 평퍼짐한 등산 언덕길이 생각나는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니 때 아닌 잠이 쏟아졌다. 한숨 자고 일어난 듯한 42년의 시공간이 몽롱하게 어른거리면서... 이제 스스로 매어 놓았던 삶의 덫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새 사립문을 찾아 힘차게 밀고 나가야 할 순간에, 간절한 여유로움을 맘껏 누리고 싶은 퇴임 후 첫날 아침이었다. 무거운 화관을 발아래 내던진 모란나무 가지처럼, 7일 금식 고해성사를 막 마친 어린 사제처럼, 생명의 몸짓 끝내고 빈손으로 웅크리던 지난 겨울정원처럼 참 홀가분하였다.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아 나서기에는 좀 성급하다 싶은 그런 첫날의 아침이었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오래오래 울렸다. 전화도 거절하고 싶었던 나른한 시간이었으나‘무슨 급전화이기에 이리도 오래 울리지?’라며 받았다. 지인에게 부탁했던 평생교육 수강 안내였다. 이번 주가 개강 주니까 얼릉 과목 선택하여 수간신청 바란다는 안내 전화다.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앉은 봄 햇살과 오전 내내 씨름하고 있는 내가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남편까지도 밖으로 나가라고 성화를 하기 시작한다. 점심을 대충 먹고 간편한 복장으로 현관문을 밀치고 데크로 나왔다. 폭죽을 터뜨리는 양 와르르 쏟아지는 봄 햇살이 먼저 환영의 축제를 열어주고, 봄바람도 친구하자는 듯이 맴돌다가 산수유 가지에 훌쩍 걸터앉아 그네를 탄다. 세상 만물이 제2의 삶을 잘 엮어가라고 응원을 하는 듯해서 나도 하늘을 향해 기지개도 켜 본다. 그리고 몸에 배인 습관으로 차에 올라타서 페달을 힘껏 밟았다. 불과 며칠 전에 여교장 퇴임식에서 <여러분, 퇴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했던 인사말을 상기하며 문화원으로 향하였다. 시간의 족쇄에 결박당했던 오랜 세월을 금방 망각이라도 하였는지, 스스로 시간에게 다시 구속당하길 주저하지 않으며 달렸다. 그리고 세상이 바빠서라기보다 내 마음이 바빠져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도 설레임으로 기다리던 새 둥지 속에 다시금 빼곡히 채워놓은 분주한 일정을 들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괜한 후회스러움이 석양과 함께 다시 밀려오는 이 순간이다.
시간에게 하고 싶었던 넋두리나 종일 늘어놓을 법도 한 첫날이 아니었던가! 모태의 자궁에서부터 늘 따라다니며 나를 놓지 않던 네게 투정이라도 부려야 할 첫날이 아니었던가! 하루해가 왜 이리 기냐고 투덜대던 젊은 날의 무료함은 또 얼마나 오만한 사치였는지...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워질 귀중한 너의 존재와 위상을 그때는 미처 몰랐었노라고... 억지라도 부리면서 말이다. 그것은 나날이 백발이 되어가는 머리카락이나 늘어나는 이마 주름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마디 예고도 없이 잔혹하게 달려가는 그 속내가 이제는 점점 두려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닿을 곳을 짐작하며 흐르는 강물, 떨어질 걸 알면서도 피어나는 새 순잎, 씨앗을 쏟아내고서야 제 몸을 내려놓는 꽃무리들, 그리고 돌아올 기약도 없이 둥지를 떠나는 철새들에게는 우주의 비밀을 넌지시 일려주면서, 유독이 우리 인생에게만은 공수레 공수거’한마디 말뿐, 세월의 가속페달만 밟아대고 있는 것이 세월이기 때문이다. 구도의 불탑을 쌓아가며 적선의 두레박을 내밀지만, 아무것도 줄게 없다며 갈 길만 재촉하는 매정한 게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보낼 준비도 미처 못 했는데 벌써 내일이 산 너머 저 쪽에서 성큼 떠오르고 있으니 어찌 아니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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