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정체성은 보은 장안 집회로 대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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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정체성은 보은 장안 집회로 대변된다”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7.03.0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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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보은 동학농민혁명의 과거와 현재
근현대사의 중요한 정점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는 동학운동의 역사적 주무대였다. 이중 충청도 보은이 차지하고 있는 동학운동의 자취는 시작과 끝을 말해 주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로 평가받는 보은집회와 마지막 전투지로 알려진 북실전투는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 시작과 끝을 연결하고 있어 보은군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오는 4월 14일 보은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보은동학제 행사를 앞두고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의 과거와 현재의 과제를 되짚어 보았다. <편집자 주>


조선 민중이 하나가 되었던 1893년 보은집회
보은에서 상주방면으로 자동차로 10여분 달리다 보면 외속리면의 소재지인 장내리가 나온다. 보습산 골짜기의 줄기가 수풀림(林)자 모양새로 굽이쳐 흘러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형세인 장내리는 19세기말 국운이 기울던 때 분연히 일어선 수만명 동학농민군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창의하여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곳이다.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선사가 산간벽지로 쫓겨 다니면서 포교 활동을 할 때부터 동학의 중심지였으며 1892년 대도소가 장내리에 설치되면서 동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래 장안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조때 말을 놓아 기르던 마장이 있었는데 이 마장 안쪽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장안』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조말에 장안을 한자로 잘못 표기하여 장내라고 문서상 기록되었으나 실생활에는 조선조 이래 줄곧 장안으로 불렸다고 한다.
서기 1893년 동학교도 3만여명이 이 마을앞 천변에 모여 교조 신원과 척양왜를 내걸고 시위를 하여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의 단초가 되었으며 2차 봉기때는 북접근이 이 마을에서 출전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곳이다.
그해 3월 동학 장안집회 때에는 하도 많은 인파가 모여 「서울 장안이 장안인가,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동요가 생길정도로 많은 동학교도가 모였다고 한다.
당시 보은 장안집회에 대해 관변측이 대처한 과정과 내용은 『취어』에 상세히 기록되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은 장안집회는 지방관아에서 볼 때 전무후무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각 보은군수는 왕조정부에 보고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 향리의 우두머리를 시켜서 동학 지도자를 만나보게 하고 또 자신도 달려가 자세한 사정을 조사 하였다고 한다.
장안마을에는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대단히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고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돌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마을에 흩어져서 잤다고 한다.
당시 대도소가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터만 남아 마을 뒤쪽의 논으로 변해 있으며 “산아래 평지에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일백여 걸음이고 넓이도 일백여 걸음이며 높이는 반장정도로, 사방에 출입문을 내었다” 라는 기록은 돌성의 당시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쌓았던 돌성의 흔적이 논둑을 이루고 있어 형상이 분명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돌성과 도소안에 모인 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교인으로서의 수행을 행했다고 한다.
관군이 와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각 조직은 군사편제로 움직였으며 북쪽산과 남쪽산에 만든 초소에 깃발을 꽂았고 40~50명 정도 지키고 있었다고 하며 당시 초소가 있던 흔적이 지금도 산중턱에 남아 있다. 이 때 장안에 모인 동학교도수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었으나 적어도 2만5천여명 정도는 모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안마을 상류에 들어선 삼가저수지가 있기 전에는 장안에는 온통 밭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추나무가 들어찬 밭이었는데 이 밭 사이에 돌성을 쌓고 집결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장안에 집결한 대규모의 교도를 관리하기 위해 포 단위의 조직을 제도화하여 정해진 포명과 대접주 50명에 이르러 다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취어』에는 각처에서 보은집회에 오는 사람을 날짜별로 지역을 밝힌 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엄청난 동학교도의 집결에 왕조정부는 해산명령을 내렸고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주장을 군대로 막으려 한 것이다.
동학교도의 교단은 정면 충돌하지 않으려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맨손으로 의지만 가지고 집결한 교도들이었기에 교주 최시형은 노약자를 먼저 물러가게 하고 젊은 교도는 남아서 정부에 본연의 뜻을 항변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4월2일부터 20여일간 집결해 있던 동학교도들은 장안마을을 떠나 고향으로 출발하였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방면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장안마을의 집회가 해산되었고 교주 및 고위 간부들은 청산 갯밭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며 활동을 해 나갔던 것이다.


북접동학지도부의 마지막 전투 ‘북실전투’
1894년 12월 17, 18일 양일간 벌어진 북실전투는 관군과 일본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북실에 남은 것은 전투가 보여준 잔악성만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묻혀버린 것이다.
대도소가 위치했던 장안면 장안리의 동학 흔적과 북실전투가 남긴 동학의 흔적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북실 전투와 관련해 가장 뚜렷한 유적은 김소천가와 종곡리 다라니 마을 뒷산에 있는 석축유적이 있으며 최후를 마감한 집단매장지로 알려진 곳이다.
다라니 뒷산의 석축보루는 동학군의 최후의 보루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복원 안을 마련하여 안내판을 설치해 역사의 흔적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곳은 집단 매장지의 흔적이다. 집단 매장지로 거론되는 곳이 많이 있지만 최근 조사에 의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곳으로 인산을 다량 함유한 토층이 상당량 매장된 안양마을 동쪽 첫 번째 계곡이 가장 확실하다. 이런 곳에 위령탑이라도 세워 유해의 흔적을 봉안하고 자세한 전투상황을 기록하여 당시 싸움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조각품으로 재현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김소천가의 복원이다. 현재도 대지 5백 80평이 한필지로 남아있는 김소촌가에 대한 재현복원이다.
북접 동학 농민군의 지휘본부 격이었던 김소촌가의 복원은 많은 재원과 현주인과의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겠지만 연차적 계획을 세워 추진한다면 동학운동에 대한 재평가 및 역사적 유물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북실전투와 관련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략적으로 검토 해 보았으나 지금 당장 추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외속리면 장내리의 동학군의 대도소가 위치하게 된 배경과 북실 전투의 학술적인 평가와 전투상황을 재현할 수 있는 시나리오 작업이 우선 추진돼 동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서울의 장안에는 관료 선비가 많은 반면 장안면 장안리에는 벼슬을 뒤로하고 성리학에 전념한 향반들이 많았다 해서 장안이라고 묻혀진 이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향반과 1890년 최제우가 세운 동학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인내천사상으로 귀결되는 동학과 천지인을 중시한 성리학은 쉽게 융화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외속리면 장내리는 성리학의 기초아래 자연스럽게 동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존재를 알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갑오동학혁명이다. 관의 압박에 시달려온 백성들이 이에 항거 봉기한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것이 동학혁명인 것이다.
일제의 강압에 항거한 3.1운동 역시 갑오동학혁명의 시발이었으며 동학혁명의 기치였던 재세구민, 보국안민 사상은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의 자주독립과 별개가 아닌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찌든 우리 역사의 흔적을 동학혁명으로 씻을 수 있을 것이며 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라도 동학혁명은 햇빛을 보아야 한다.
누군가 “일제 때 청주교도소에는 보은 사람이 많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왜 보은사람이 유독 많았을까 그것은 바른 말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인권을 되찾기 위한 항거였던 것이다.
동학의 뿌리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민중봉기인 것으로 전라도 정읍지역에서는 동학 유적지에 동학기념탑을 세워 갑오선열들의 의병항쟁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보은지역에 동학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장안면 장안리 서원계곡에 설치되었던 동학 취회지의 안내판이 유일한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사의 끊임없는 논란속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역사적 재평가를 거듭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고 있다.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은 보은의 의로운 정신을 되찾는 첫 번째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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