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잡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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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새
  • 이장열 (사단법인 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6.06.0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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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참 지난 이야기다. 아내가 잘 아는 충청도 어느 시골집에 봄나들이를 갔다. 그 집은 구릉같이 생긴 야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매실밭 가운데 있었다. 주위에 동네집들이 있긴 해도 약간 떨어져 있어서 그 집은 차라리 외딴집의 부류에 속했다. 때는 한창 꽃피는 봄철이라 주변은 온통 수십년생의 굵은 매실나무들이 뿜어놓은 꽃과 향기로 덮혀 있었다. 가끔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멀리 꽃동네마을을 보곤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온몸으로 느껴본 일은 없었다. 나무들은 모두 꽃을 한 아름씩 안고 서있었다. 사방은 그저 한없이 밝은 빛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것이 고요함이라는 것이로구나! 나는 무심결에 매실나무꽃이 만발한 과수원 속을 한걸음씩 아주 천천히 내딛고 있었다. 이윽고 들리는 벌들의 역사소리. 아, 소리가 있었구나.
매실밭 속에서 사방을 살피던 중, 머리위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놈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 그때였다. 그놈은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 더 앞가지 쪽으로 깝죽깝죽하고 자리를 옮기면서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고놈은 호르륵거리며 이 나무에서 저나무로 살짝 살짝 뛰어 옮기며 “이 것 좀 보세요” “저 꽃도 좀 보세요”하고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고 쪼고만 놈이 혹시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그 녀석의 인도를 따랐다.
그렇게 꼬마새와 같이 과수원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꽃구경을 하고 있는데 나의 그런 모습을 조용히 뒤따르며 살펴보는 녀석이 또 있었다. 쪼꼬만 소녀였다. 그 집 주인아주머니의 딸 같았다. 소녀는 혼자서 뭔가 쫑알거리더니 심심한지 나에게 말을 시켰다.
“아저씨 여기서 뭐하세요?” “꽃구경 해.” 우리는 이렇게 말을 텄다. 소녀는 나에게 계속 이런 저런 말을 시켰다.
“너는 장차 뭐가 되고 싶니?”
“어사가 될거예요” “어사?” “예, 어사가 될래요” 하고 소녀는 작은 입으로 조잘거렸다.
“암행어사?” “아니, 어사요”.
그 꼬마소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조금 지난 후였다. 그 소녀의 말은 ‘암행어사’라고 할 때의 ‘어사’가 아니라 ‘의사’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소녀는 다리에 문제가 있는지 걸음걸이가 약간 이상했다.
그 후 우리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농촌마을로 이사를 왔다. 매실꽃이 만개한 새하얀 봄날에 꽃길로 나를 인도한 작은 길잡이 새, 그리고 조그만 입으로 병아리같이 조잘거리던 꼬마 소녀가 우리를 자연으로 인도해주었다. 사철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오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연의 풍경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고, 내 좋아하는 독서와 사색과 종이와 연필을 벗하는 여유로움이 있는 농촌이 정말 좋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자연생활은 약간의 대가도 지불되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내미는 잡초와의 전쟁이 그것이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하루사이에 그동안의 작업이 헛일이 되고 마는 잡초의 강한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몇 년후 장차 커서 “어사”가 되겠다고 조잘대던 소녀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다리 수술을 받았다. 커서 의사가 되겠다고 한 소녀의 희망이 왜 의사였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쯤은 한 스무살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결혼한다는 소식은 없다. 그때는 내가 꼭 가서 그 말을 해 줄 것이다.
<이장열, 사단법인 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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