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우리 아이들의 어렸을 적 생각이 뇌리에 스쳐간다. 어쩌다 두 아이가 싸우게 되면 가족이 두 편으로 갈라져 티격태격하다 끝내 가족회의로 마무리를 짓고 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밥상머리에서 상황 마무리를 공평하게 해 주려고 애쓰던 부모의 태도는 있었으나, 아이들의 인성에 그리 쉽게 녹아들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중용의 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중용`의 어의를 대강 짚어보자면, 송나라 때 탄생한 사서(四書:논어,맹자,대학,중용)중의 하나로 <유교 경전의 오케스트라>라고 칭송한다.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며, `庸`이란 평상(平常)을 뜻한다고 적혀있다. 무한경쟁만이 이데올로기였던 춘추전국 시대에 전쟁과 경쟁의 와중에서 희생양이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방법론 중의 하나라고도 적혀있다.
나는 관리자가 되면서 해마다 학교 경영론을 열거할 때면, 이 중용철학을 홍익인간과 나란히 교육이론의 근간으로 택일하였었다. 학교안의 모든 갈등에서 생기는 파문을 잠재우기에는 모순마저도 끌어안고 가라는 중용철학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 둘이서 싸우고 있다고 할 때, 서로 잘했다며 우기기만 하는 두 아이에게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만이 책무가 아니라, 앞으로 더욱 사이좋게 나가도록 전화위복을 열어주는 것이 중용의 이론이다. 얼마 전에 한 정치인이 탈당을 하고 새로운 창당건립을 발표하면서, 중용의 정치판을 만들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중용철학을 운운하는 판에 한번 희망을 걸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중용에서 `가운데인 상태`란 변치 않는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점을 찾고 조화로운 최적 가치를 찾는 데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간, 노사 간, 빈부 간, 갑을 간, 그리고 보수 진보 간에 발생하는 갈등은 모든 공동체의 미래를 어둡게 할 정도로 점점 예민해져 가고 있는 오늘날, 중용의 도는 작게는 자녀교육에서 크게는 국가 경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TV를 끄고 현관문을 활짝 열자 가을이 성큼 달려와 안긴다. 비취빛 창공아래서 피어난 가을꽃 하얀 웃음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욕망의 부스러기들 버거워지면 슬며시 겉옷 하나 벗어던질 감나무 등걸아래 앉으니, 사계절 자연의 순환도 중용의 도를 다하기 위해 저리도 용을 쓴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도에 어긋나는 일들이 비일비재 넘쳐나는 이 위험한 시대에, 중용의 이치는 가정과 학교에서 밥상머리 교육으로 받아들이기에 진정 합당한 교육철학이 될 것이라고 사료된다. 기원전에 공자와 자사가 던진 매력있는 화두가 이 글로별 정보화 미래사회를 짊어질 우리 아이들에게 유익한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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