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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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산
  • 시인 김 종례
  • 승인 2014.10.02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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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나무 의자위에 가을이 주저앉아 주인 노릇을 하느라고 연일 바스락대는 요즘이다. 혼자서 집을 지키며 한가했던 지난 주말에, 오랫동안 방치해둔 서랍장을 정리하려고 잡동사니 물건들을 방바닥에 우루루 쏟았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쓰시던 오래된 서랍장 물건들이다. 가운데 서랍을 쏟을 때이다. 낡은 파고다 양말 곽이 방바닥에 나뒹굴어지면서 황금주유소 라이타 몇 개, 도막초 한 개, 명주실 타래 한 뭉치, 그리고 잘 접은 분홍빛 손수건이 방바닥에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시어머니 생전의 모습이 뭉게구름처럼 뭉글뭉글 떠올랐다. 모두가 어머니께서 쓰시던 물건이었기에 얼른 만지지 못하고 한참을 오묘하고도 멍멍한 가슴만 쓸어내렸다. 나는 먼저 조각난 도막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나서 낡은 분홍빛 손수건을 활짝 펼쳤다. 그 순간 몇 장의 지폐들이 만추지절 낙엽처럼 펄럭펄럭 방바닥에 나뒹굴어졌다. 순간 <웬 돈?> 중얼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만원권 8개 오천원권 2개 천원짜리 3개였다. 빛바랜 종이조각 13장이 나를 보고 ‘정말 오랜만이야. 답답해서 혼났어’ 하며 원망을 하는 듯 했다. 아니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내가 너에게 평생 용돈을 받아서 이 사람 저 사람 선심을 썼지만, 한 번도 너에게는 뭐 하나 주어 본적이 없잖냐? 그리고 선물 한번 사준일도 없잖냐? 그래서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남겨놓는다~~> 눈물이 났다. 사랑과 자비심을 주셨던 그 분이 물질 한번 못 건네주셔서 필경 가슴이 아프셨나 보다. 시어머니께서는 어린 아이처럼 돈의 가치를 하나도 모르시다 가신 분이다. 읍내 시장 한번 혼자 다녀본 적이 없으셔서 당신 속옷조차도 한 번도 거래를 해 본적이 없으신 물물교환의 전수자이셨다. 그렇게 돈의 가치를 모르시다 생을 마감하신 분이지만, 한 번도 그 분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다. 아마도 자식들 중 누군가가 마지막 쥐어드린 주머니 씨갑씨를 주물럭거리시다, 어느 외손이 찾아왔을 때 조금 꺼내어 선심 쓰시고, 그 남은 것을 이렇게 꽁꽁 싸매서 당신 손때 묻은 서랍장 파고다 양말 곽 속에 넣은 것조차 까맣게 잊으신 채.... 여러 해 병석에 누워계시다 운명을 하신 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은 한 번도 소유하지 않았던 소박함과 청렴의 일생이셨다.
소록도에서 평생 한센인을 돌보며 봉사하고 계시는 유의배 신부님에게 기자가 앞으로의 비전이 무엇이 남아 계시냐고 묻자, 그 분은 기꺼이 <돈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대답한 말이 오늘 생각난다. 정말 돈이 없어도 그런대로 살맛나는 세상은 흐물흐물 만들어 질 것이다. 할리우드의 명배우 오드리도 돈을 무진장 모았던 30년의 화려한 여배우 생활보다는, 모았던 돈을 하나하나 버리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살았던 5년이 자기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하였다. 동화책속에 가난하지만 의좋은 형제가 우연히 생긴 황금으로 인하여 욕심의 노예가 되어 서로 미워하다가, 가지고 있던 황금을 호수에 던져버린 후부터 다시 의좋은 형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는 말씀도 오늘 다시 생각난다. 부자가 겸손한 태도와 정확한 판단력으로 살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는 뜻이다. 이렇게 돈이란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효율적인 값어치를 구현할 때 제 구실을 하는 게 아닐까?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서 자신의 영혼과 사투하며, 욕심과 욕망으로 영위되는 삶은 고통의 원천이 될 수가 있다. 세간에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이 재산으로 소송제기까지 하며 일가의 치부를 드러내는 비극이라든지, 재산문제로 부모와 형제를 살해하는 카인들의 후예가 그 수를 더해가는 이 시대에, 불필요한 마음빼기와 욕심빼기에 대한 지혜와 기쁨을 터득하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라 여겨진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남겨주신 빛바랜 13장의 지폐를 바라보며 수많은 생각을 하였던 그 하루를 잊을 수가 없다. 이 유산을 어떻게 유용한 가치로 사용하여 어머니의 절제된 삶을 길이길이 정립해 드릴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하면서.... 시어머니의 이 유산은 필경 돈이 아니다. 돈으로는 절대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의 삶의 교훈인 것이다. 쪽진 창으로 들어온 샛바람이 지폐 몇 장을 허공으로 날린다. 소멸의 섭리를 가르치며 한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천지에 흩날리는 저 낙엽처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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