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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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단상
  • 송원자 편집위원
  • 승인 2012.10.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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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이 익어가고 있다. 푸름으로 우리에게 싱그러움을 주었던 풀잎과 나뭇잎들은 이미 퇴색되거나 곱게 물들어 있다. 가을을 더 가까이 느끼려 산을 올랐다. 산길 초입부터 많은 것을 산은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쾌적한 향기를 뿜어내는 산국과 감국이 노랗게 웃고, 바닷가에서 볼 수 있다는 해국과 쑥부쟁이가 보랏빛 얼굴로 파란하늘을 향해 하늘거린다. 능선을 따라 주변에 하얀 구절초가 상큼한 모습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소녀시절에, 삼년산성 무너진 성곽사이에 보랏빛으로 핀 쑥부쟁이 꽃을 보고 들국화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산 곳곳에 여러 가지 들국화가 가을 산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꽃들이 자기의 빛깔과 향기와 의미를 지니고 피어 있다.
맑은 새소리에 섞여 나무들끼리 수런거리는 소리와 낙엽끼리 부딪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밤나무아래에는 빈 밤송이가 수북하게 쌓여있고 등산로에는 도토리가 꽤 많이 보인다. 순간 이 도토리를 사람들이 주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의 주인인 다람쥐나 산짐승들의 먹이로 남겨놓아야 할 것 같다.
수확의 계절을 맞아 산짐승도 사람들도 손길이 바쁘다. 나 역시 평소보다 조금 손길이 바빠졌다. 벌레 먹은 밤을 골라서 껍질을 까서 냉동실에 보관하고, 은행도 까야하고... 또 밑반찬이 될 만한 것들로 도토리묵도 썰어서 말리고, 호박도 썰어서 말린다. 그리고 좀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고추부각으로 풋고추를 밀가루에 묻혀 찜 솥에 찐 다음 말리는 것이다. 고추가 작은 것은 통째로 하고 큰 것은 자르는데 매운 것은 정도에 따라 물에 담갔다가 이용한다. 이 고추부각은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서 좀 욕심을 부려 많이 만들려고 한다.
이렇게 햇빛에 말려야 하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르게 되는데 종류에 따라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곶감이다. 단단한 감을 껍질을 깐 다음 줄에다 몇 개씩 묶어 말리곤 하는데, 채반에다도 말려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내어놓고 저녁에 들여놓는 일을 반복하며, 골고루 말리기 위해 햇빛을 본 것은 뒤집어 놓는다. 그런데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곶감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햇빛이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까서 잘 말리려 해도 비가 며칠 오면 바로 곰팡이가 생기고 감이 축 쳐져서 버려야 한다. 그런 걸 참 많이도 반복한 것 같다. 어느 해는 분명 날씨가 좋아 옥상에다 곶감과 고추부각을 널어놓고 외출했는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내려 어느 정도 말린 것들을 다 버려야 했다. 이렇게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곶감을 맛볼 수가 없다.
올해도 100여개의 틈실한 감을 깎아서 말리고 있다. 감을 껍질을 까서 6개씩 한 줄에 매달아 옥상의 빨래 줄에 묶어 놨다. 저녁에는 비닐로 덮어준다. 아침에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옥상에 올라가 비닐을 벗기는데 한 동안은 비닐 밖이 아닌 안에 습기가 차서 물이 뚝뚝 떨어지곤 했다. 감에 있는 수분이 새어나오는 것 같다. 지금은 보름정도 되다 보니 비닐을 벗겨도 물이 차지 않는다. 아마 감의 겉이 어느 정도 건조된 것 같다. 그렇지만 아직도 속은 홍시처럼 물렁하다.
아침에 옥상에 올라가 빨래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감을 보면 흐뭇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답답해진다. 언제쯤 먹기 좋은 곶감이 될지, 아직 더 얼마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앞으로 열흘, 아니 한 달, 그 안에 비가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도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언제쯤 이루어질지 의문인 때가 많다. 그것은 삶이 자기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때가 왔어.” “이제 다 익었어.” 이렇게 확신했는데 그것이 무너졌을 때의 좌절감.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자기 길을 향해 시작해야 할 때의 막막함. 그 속에서 다시 용기를 내고 자신감을 되찾을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살아가면서 우린 인내심을 가져야 할 때가 참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삶 자체가 참고 기다리는 일의 반복이 아닐까? 그렇게 아픔을 겪으며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오만이 삭고 또 삭아 뿌리 채 뽑혔으면 좋겠다.
이 푸른 가을날에 기도해 본다. “자랑하지 않고 늘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고 낮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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