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대왕 왕릉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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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대왕 왕릉약사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0.07.1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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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른 신라 제56대 왕, 김씨 38대 왕의 기록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다.
경순대왕의 왕릉약사를 보면 경순왕은 문성왕 제31대의 6대손으로 부친은 효종공이고 모친은 헌강왕 제34대의 딸인 계아 부인 김씨다.
비는 죽방부인 박씨와 고려 태조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별빈 안씨이다.
서기 897년에 탄생하여 후백제의 견훤이 침공하여 전왕인 경애왕이 살해되므로 인해 백성들이 추대하여 서기 927년 11월에 신라 천년 사직의 마지막 임금인 김씨 왕조 제38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경순왕은 즉위한 뒤, 8년간 기울어진 나라 정치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자 간신배를 없애고 해이한 기강을 진작시키려고 무단히 노력했으나 간신배의 뿌리는 크고 깊어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더욱이 궁예와 견훤이 강세하여 여러차례 침략을 해왔고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일반 민심이 고려로 기울어져서 아무리 피로써 항진한다 할지라도 나라를 보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군신회의를 열고 고려에 귀부할 뜻을 밝혔는데 태자와 몇몇 충신들만이 간하였으나 경순왕께서는 비장한 결의로 "내 비록 망국지왕이라는 오명을 쓸지언정 무고한 민생을 희생시킬 순 없다."고 말하며 인자한 마음씨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양구했다.
서기 935년 신라 개국 992년 10월에 김씨 왕조 38대의 587년간의 신라가 종식된 것이다.
왕건 태조는 경순왕에게 유화궁을 제공하는 한편 정승으로 제수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 후 송도에 신란궁을 재건하고 여생을 보내다 고려 경종 3년 서기 978년 4월 4일에 승하하여 시호를 경순왕이라 추봉하였다.
경순왕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접한 신라 유민들은 장사진을 이루어 경주로 모시려고 하였으나 왕의 구는 백리밖에는 못간다는 말이 있어 장단부 남팔리 동향동 고량포 성거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에 예장하였다.
왕릉은 계좌정향으로 팔백연화격 또는 황계포란행으로 일컬으며 임진왜란 이후 능이 오랫동안 실전되었다.
조선조 영조때 근처 주민들이 능 앞에 묻힌 김부대왕 지릉이라 새긴 석비와 지석을 발견하였으며 당시 후손인 김응호가 왕께 상소하여 영조 23년 1747년에 전조 왕릉 예우에 따라 봉축 수호하고 향사를 받들게 했다.
왜정치하에 와서는 향사제도가 없어지고 왕릉수호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8.15해방과 6.25사변으로 또 다시 실전되었다.
그리고 나서 천행으로 휴전선 남쪽에 위치하게 되어 왕릉을 관할하는 지역 육군부대 장병에 의하여 1973년에 발견되고 경순왕릉임이 확인된 후 당시 경주김씨 중앙 종친회장이 정부에 건의하여 사적 244호로 지정했다.
그 후 왕릉을 봉축하고 중앙종친회 주관으로 매년 10월 3일 개천절 오전 12시에 제례를 봉행하고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배하고 있다.
1983년 김종호 중앙 종친회장은 왕릉수호 관리사업으로 모역 확장, 비각 화장실, 안내판, 보호철, 광장 및 주차장 설치와 잔디식재 등 능역정화사업과 보수공사를 정부 예산으로 추진 시행해 노고가 많았다.
/이흥섭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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