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직필로써 지역발전에 기여 잊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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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로써 지역발전에 기여 잊지 말아야“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0.07.1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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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13일 군 최초 지역지 보은신문 창간
서울 종로 3가서 불교서적 출판사인 '진영사' 운영
“30여 년 간 서울 종로에서 사진식자 출판업을 경영하면서 무언가 고향을 위해 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지역신문을 만들어 정론직필로써 지역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해보겠다는 생각이 바로 창업의 모태가 됐습니다. 지역신문으로서 가장 중요한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보은읍 이평리가 고향인 이환욱(75·진영사 출판경영) 전 보은신문 대표이사 회장은 의욕에 찼었던 혈기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언 창간 20주년을 맞은 보은신문의 발전을 축하하며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전성기 출판사업 불교관련서적, 용품 등 명성

이제는 집주변 텃밭에다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등을 두루 가꾸며 전원생활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는 텅 비워진 마음의 세계를 이야기 하듯 생각하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는 “당시 사진식자 출판업으로 꽤 알아주던 시절, 종로3가에서 진영사란 출판사를 운영했었지요. 특히 삼청동 칠보사의 석주스님(불교계의 고승)과의 인연으로 불교전문 출판 사업을 하게 됐어요. 전에는 전무했던 찬불가 등 불교 어린이교재나 어린이 용품 등에서 시작, 일반 불교용품 가게까지 운영하였지요. 그러나 그런 사업은 명예는 있었을지 몰라도 사업성이 없는 것만 골라 했다는 생각은 듭니다.”라며 객쩍은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또한 서울서 동종의 출판사를 경영하다보니 당시 민음사의 박맹호 회장과의 친분도 컸다는 그는 현재는 보은출신으로 굴지의 출판사로 거듭난 민음사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1990년 군 최초로‘보은신문’창간호 발간

그는 군에서 처음으로 언론의 불모지였던 곳에 새 바람을 일으켜 지난 1990년 1월 13일, 보은신문 창간호를 발간해낸 주역으로 주민여론을 대변하고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지역의 한 원로이자 언론인이었다.
또한 그는 초창기 때부터 한국지역신문협회 충북지회장을 맡아 지역 언론문화를 정립하는데 나름대로 기여한 바도 매우 크다.

그런 그는 아직도 인고의 세월 속에서 군수, 의장, 서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보은신문창간 축하연을 가졌던 당시 지역 언론지로서의 위상에 대해 색 바랜 추억을 마음의 앨범에 담고 있을 정도로 애착을 갖고 있을 정도다.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시절이, 지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신문 창간을 통해 지역발전을 위해 지역의 변화를 앞당기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출판사 운영으로 인해 신문에만 온전히 정신을 다 쏟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자책감과 그동안 신문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던 모든 임직원들에 대한 미안함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정론직필’만이 지역발전 위한 밑거름 될 터

유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고혈압으로 얻은 지병으로 다소는 어눌해진 말투, 불편한 걸음걸이 등 신체적 결함을 갖고는 있지만 그래도 정신만은 또렷해 일이 없는 날이면 만들어서라도 매일 읍까지 왕복 4㎞의 도보를 즐기며 산다고 말한다.

“지금 어때요.보은신문은. 오랫동안 소식을 못 접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략은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있지요. 그동안 어려움이 많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한 때는 보은신문이 전국적으로 알아주던 신문이었을 때도 있었어요. 엄격할 정도로 창간정신에 위배되는 그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정론만을 고집하며 군민과 지역발전에 이익이 되기 위한 신문을 만들려고 동동거리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당시에도 정치야망을 가진 사람은 언론에 절대 발을 디뎌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아직도 신문이라면 정론직필의 끈을 놓지 않는 지론을 갖고 있는 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이 신문에 관여하면 제대로 된 지역신문의 색깔을 낼 수도 없고 또한 타협하게 되므로 제대로 된 언로를 걸을 수 없게 되는 부작용을 낼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5년 이환욱 회장, 임병옥 사장 공동대표 구성

지난 1995년 1월 21일, 보은신문을 법인체제로 대거 전환하고 당시 편집인이자 대표이사 사장이었던 그는 회장으로, 경영의 합리화를 위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한 그가 임병옥 대표이사를 사장으로 선임, 공동대표 이사직을 갖는 임원진 인사를 대폭 단행하기도 했다.

“지금생각해도 친구의 친구였던 임병옥씨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지요. 처음 그 사람을 소개 받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참 고마운 생각이 들지요. 어려웠을 때 그는 편집에 대한 어떠한 불만도 없이 보은신문을 위해 나름대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고향을 위해 재경군민회장으로서 여전히 왕성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가 말하는 임병옥 회장은 현 재경군민회장을 이끌고 있고 외속리면 장내리 출신으로 속리초와 보덕중, 보은농공고(임과 17회)를 졸업하고 일찍이 상경,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초판 당시 신문 8000부 인쇄했던 전성기 구가

“지금 신문 부수가 몇 부 발행되지요? 20년 전인 1990년 당시 초창기에는 출향인들에게 보내는 신문을 포함해 신문부수가 약 8000부 가량 인쇄됐을 걸. 아마 보은사람과 외지사람이 반반 정도 비슷하였을 거야. 그 때는 또 보은인구도 많았을 때고 하니까. 당시 나의 모친이 많이 아프실 때로 기억되니까…신문 발송을 위해 제수씨를 포함 이웃 아주머니들과 함께 작업을 했지. 거의 서울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시피 했고. 그게 보은신문과 맺었던 아련한 추억담이기도 하지요.”

지금 생각 하면 신문사가 만성적자의 원인이 됐던 것이 신문사와 본 사업의 명확한 선을 긋지 못했던 것이 불찰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또한 신문의 지향점을 지역에다 두었어야 했다는 후회감도 많이 든다.”고 말했다.


◇보은중 1회로 재경보은중학교 동문회 발족


옛날이야기를 펴놓다보니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며 말을 잇는 그는 “나는 보은 중학교 1회로 학교와 지역에 애착이 많은 편 이었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활동할 당시 재경보은중학교 동문회를 내가 조직했지요. 당시 동기들과 후배들이 많은 협력을 해주어 발행부수나 구독자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도와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 김재걸 초대이사장 보은장학회 첫 설립

지역에 애착을 갖고 일하다보니 세월이 가면서 그에게는 또 다른 소명감이 타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은장학회 설립 문제였다.

고 김재걸 초대이사장을 시작으로 그는 2대 이사장이 되었고 현재는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되어 있기도 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를 둔 학생들이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게 된 것을 알고는 장학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 거지요.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재단법인 보은장학회의 태동이었어요. 제일 처음 장학회 설립을 하게 된 것은 마로면 적암리 출신인 김재걸 초대이사장이 자신 소유의 빌딩을 희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지요. 당시 김 이사장은 위암을 앓고 있었어요. 보온병에 약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도 여러 차례 방문을 하곤 했지요. 현재 적암리 버스정류장 옆 그의 송덕비가 제막돼 있어요. 내가 그때 송덕비제막 추진위원장이었으니까 확실히 기억납니다.”


◇현 보은신협 본점 2층서 시작된 보은신문사

어쨌든 현 보은신협 본점 2층 옆에서 좋은 집기없이 책상 몇 개로 시작된 보은신문이 이제 20년을 맞은 성년으로 자리학 된 것에 대한 감회에 젖는 그다.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보은신문 사장이었던 동생 이시욱(전 보은농협 전무)씨에 대한 아련한 회고와 또한 고인이 된 막내동생 청욱씨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그다.

그의 이력은 또 있다. 내북초를 초임으로 부임해 내북초 이원분교, 종곡초, 삼산초의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교사였다.

그에게는 기억나는 감동의 일화가 있었다. 삼산초등학교 재임 후 군입대 당시 그를 환영하는 학생들이 학교정문을 위시로 도열했었던 일이다. 그에겐 이젠 추억으로 되새김질 할 만한 일로 남아 그의 여생을 행복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달 두어 번 속리산 탈골암 방문 큰 기쁨

요즘 그는 건강과 인생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속리산 탈골암을 찾는다.

그는 대웅전을 찾아 불편한 다리도 무릅쓰고 칠 배 정도 차리는 예가 다이지만 이러한 과정이 그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낙이자 기쁨이 되는 일 이라고 말했다.

가족으로는 일생을 함께 하며 한 길을 가고 있는 동반자인 박소자(70)씨와 2남1녀를 두고 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나 죽으면 화장해라. 비석 같은 돌붙이를 갖다 세우지 마라”라고 주문하고 사는 그의 일상은 늘 자연과 더불어 살며 마음을 비우는 것 뿐이다.

그리고 매일 4㎞의 길을 자택에서 읍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그 과정의 일상을 누리는 것이 호사라고 생각하며 사는 그다.

그러한 무념의 일상 속에서도 그가 여전히 잘되기를 바라는 것에는 “보은신문의 창달과 처음으로 조직했던 재경보은중학교 동문회, 보은장학회 등이 계속해서 잘 화합하고 발전해 나가는 이 세가지 소망"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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