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지도원’에서 ‘민선군수’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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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지도원’에서 ‘민선군수’가 되기까지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0.06.1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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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혁 군수당선자의 인생 역정
▲ 멀고도 멀었던 당선의 길. 지난 3일 새벽 2시 30분 온갖 역경을 딛고 드디어 당선 승리의 환호를 울리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든 정상혁 군수당선자.
6·2지방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던 3일 새벽 2시 30분 쯤. 당선이 최종 확정되며 정상혁 군수후보의 손이 드높이 올려 진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동안의 역경을 이겨내고 드디어 민선 5기 군수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선거사무실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당원들과 관계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대며 그동안의 절절했던 마음의 상흔을 뒤로한 채 최후의 승리의 박수세례를 퍼부어 주었다.

◇회인면 골짜기 출생 시골뜨기 어린 정상혁

▲ 지난 82년 정상혁 군수당선자가 환경청 계획조정국에 근무할 당시 짬을 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라살림이 지독히도 어려웠던 한국의 지난 47년 3월, 회인면 쌍암리 354-3번지에서 태어난 정상혁은 아름다운 마을 회인에서 산세의 정서적인 감흥을 받으며 성장해 53년 회인(회동)초등학교를 졸업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달리 인정이 많아 교우관계에서 인기도 많고 공부도 곧잘 했던 정상혁은 학교운영위원장까지 맡을 정도였단다.
특히, 회인면은 산세 좋고 풍취가 좋아 자연의 멋을 아는 사람들이 애착을 느끼는 곳으로 더욱 안개도 많아 정감도 월등히 뛰어난 곳이다. 정지용시인에게서 사사를 받았다던 천재시인 오장환 시인은 바로 이곳 회인면 사람이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정상혁은 문학에도 심취하여 보은 문학회로 등단 한 후 자유롭게 시를 쓰며 사색할 줄 아는 회인의 보통시인이 되었다.

◇대꼬챙이 한학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수학

10여 년 전 88세로 작고한 그의 부친은 회인면 쌍암리에서 성격이 대꼬챙이로 소문이 났던 한학자였다.
마을에서 돈이 궁했던 사람에게 돈을 꾸어줄 때도 결코 이자를 받지 않았던 기억들이 그에겐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난 2001년, 그는 쓰러져가는 본가를 옆에다 기념 삼아 내어 두고 새로 집을 지어 서울에서 고향인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바로 현재의 새로 지은 집터가 있는 곳이 부친이 살아생전 오가는 상인이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밥을 지어 먹였다던 그 ‘사랑채’가 들어서 있던 곳이다.

◇수령 100여년 뽕나무 인근에 두 그루 나무

그 ‘사랑채’에서 민선군수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100여년이 훨씬 넘은 아름드리 뽕나무가 서있다. 언제나 슬픈 일이 있거나 고민, 절망 등이 몰려올 때면 그는 나무 아래서 한참의 생각과 마음을 고르곤 했다. 이 세상에서 부모님 대신 그의 마음을 달래줄 유일한 ‘비빌 언덕’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10여 년을 지켜온 ‘한나라당’에서 공천으로 버림받았을 때였다고. 그래서 그즈음 그는 가장 오랜 시간을 이 나무아래서 힘든 시간을 보내며 위로를 받아야 했다고.
나무로서가 아닌 든든한 위안처인 뽕나무 인근에 그는 또 상징적인 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하나는 그가 ‘도의원’이 되었을 때였고 또 하나는 종손주가 태어났을 때였다.

◇부인이 바라본 남편 ‘강직’ ‘자상함’이 강점

▲ 지난 78년 정상혁 군수당선자가 농촌진흥청에 근무할 당시 휴일을 맞아 부인 이문자씨와 자녀들 3명과 함께 단란한 한때를 즐기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교직경력 40년인 동갑내기 부인 이문자씨는 그동안의 남편이 겪은 파란만장한 정치역사를 무척이나 안쓰러워 했다.
청주사범병설중(현 청주교대 전신) 동기로서 서로를 지켜온 세월이었다. 가정적인 남편의 모든 것을 존경하며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워낸 이 씨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힘이 되어 주었던 남편의 자상함이 큰 무기였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강직함과 자상함은 강점이라며 지나간 정치인생에서의 아픈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족에는 큰아들 운봉(44·치의학박사)과 둘째딸 한실(41·화가), 막내딸 현진(37·예술학 박사)이 있다.
이씨 부부는 주말마다 함께 내북면의 ‘주성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큰 일과이며 행복이라고 했다.

◇단 한번뿐인 군수 기회 안겨준 군민에 ‘감사’

지난 57년 청주사범 병설중, 60년 청주농고, 64년 충북대 농과대를 졸업한 그는 66년 육군제대 1년 후 중원군 농촌지도소 산척지소 농촌지도원이 되었다.
그리고 68년 도 농촌진흥원 지도국으로, 73년 농촌진흥청 공보관실, 80년 환경청 계획조정국을 거쳐 89년 연세대 산업대학원 고위자 과정을 수료하고 보광산업 대표이사, 충북도립대 강사, 2002년 6월 충북도의회 도의원으로 등극한다. 그것이 그의 정치인생을 알리는 서막이 된 것이었다.
그는 이번 6·2지방선거의 보은읍 중앙사거리 유세연설 때 정동영 민주당 선대본부장, 이회창 당 대표 등 이 방문한 합동유세장에서 목울대에 힘을 주어 논둑 밭둑으로 다니며 통일벼를 농민들에게 홍보했던 공직 초짜배기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군정을 펴겠다고 군민들을 향해 공약했다.
그것으로써 군민들은 조용히 그의 임기 4년간의 행보를 지켜보면 되게 됐다. 인생에서 단 한번 뿐인 군수의 기회를 안겨준 군민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지난 4일부터 발로 걸어 다니며 인사를 다녔던 그였다.

◇파란만장한 정치역경 극복 대망의 군수에 올라

줄곧 한나라당에 몸담으며 당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던 열성 지도당원이었던 그는 지난 2002년 당당히 충북도의회 도의원에 당선된다.
2006년에는 한나라당 후보로서 군수선거에 도전장을 냈으나 당시 박종기 군수와의 공천경쟁에서 스스로를 탈락시키며 결국 이로써 군수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하게 된다. 1년 후 다시 한나라당에 재입당한 그는 2008년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다.
그는 또 6·2 지방선거 군수후보로 나서기 위한 철저한 준비로 도전을 하려했으나 한나라당 측의 공천 배제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참지 못해 드디어는 탈당을 선언한다.
그는 2010년 4월 18일 미래연합에 입당했다가 다시 탈당, 4월 23일 자유선진당에 입당, 군수후보로 나서 남부 3군 불패신화의 주인공인 이용희 의원의 전폭적인 사격지원을 등에 업고 당당히 군수선거에서 승리의 왕관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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