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신화 이룩한 인광, 고향의 인재육성에 뜻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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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신화 이룩한 인광, 고향의 인재육성에 뜻 펼쳐’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0.05.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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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광 김상문 회장
“무슨일이든지 초심(初心)을 잃지 않는다면 성공이 그렇게 멀리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에게 고향은 부모님과 같은 애틋함을 지닌 동격입니다.”
충북 보은출신의 재경기업인인 (주)인광 김상문(59·서울시 동작구 신대방동)회장은 지난 20년 인고의 세월 속에 초심을 잃지 않고 이룩해 낸 인생 성공 스토리를 이렇게 간략하게 풀어낸다.
중견기업인으로서 최근 늦깎이로 한국방송통신대에 입학하면서 집필하기 시작한‘저우언라이’(중국 혁명지도자 주은래 재조명)가 세간에 주목을 받기 시작, 베스트셀러로 입성하고 있다.
다른 2권의 저서도 내년 쯤 출간 예정인 그는 지금까지 이례적이고 전무후무한 일들을 많이 해냈지만 앞으로도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말하는 종횡무진하는 그를 만났다.

◇친환경기업의 선두주자 인광 창업하다

그는 지난 91년 5월, 자본금 19억여 원을 들여 현재 친환경기업의 선두주자로 우뚝 선 (주)인광기업을 창업했다.
비계, 구조물 해체에서부터 건설폐기물의 수집, 운반, 중간 처리 및 재활용까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친환경적 처리시스템을 구축하고 폐기물을 다시 재활용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환경오염과 부존자원의 고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품질 순환재생골재의 생산이야말로 자원고갈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환경마인드’를 중요한 미래의 원천으로 생각할 줄 알았던 탓에 오늘의 주식회사 인광을 만드는 토대가 됐던 것.
연 매출 400억을 올리는 주식회사 인광은 그밖에 인광산업, 인광아스콘, 인광 E&C, 중앙화약 등 4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사업체로 성장했다.


◇어려웠던 가정환경, 오히려 힘의 원천

보은군 이평리(현 중원주유소 자리)는 그의 출생지다. 지금은 모두 작고했지만 부친 54세, 모친 36세되어 뒤늦게 생산한 아들이 바로 김 회장이다.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특히 모친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회상한다.
“모친의 사랑이 있었으므로 고향을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습니다. 자급자족만으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 힘만으로는 어려웠던 살림 탓에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힘들게 사셨습니다.”
“가난했지만 많은 사랑을 많이 받은 탓에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김 회장은 “제가 아낌없이 받은 사랑을 고향에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무척 큽니다. 무얼 바라서도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틋함일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삼산초등(52회), 보은중(17회), 보은농고 2년 중퇴가 그의 전 학력이었다.

◇군 제대 후 지역에 명문 성문학원 개원

“보은농고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 대한 부적응으로 많이 힘들었죠. 결국 2학년 때 중퇴를 했어요. 1년을 휴학하고나서 바로 72년에 군에 입대하기로 마음먹었죠. 죽 보초병으로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연로한 부모와 가난함을 벗을 방법은 공부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시 군대에서 지급된 ㄱ자로 꺾인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그때 못 다한 공부의 한을 다풀었어요.”
35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후 공무원시험이다, 아르바이트다 생활전선에 뛰어들던 그는 보은 지역에다 ‘성문학원’을 차려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학생수가 많을 때는 무려 150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때 제자들을 가르친 힘은 순전히 군대에서의 독학의 힘이죠. 영어, 수학은 물론이고 전 과목에 걸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어요.”
그러다 지난 80년 5월(전두환 전대통령 시절) 전국적인 과외금치조치가 내려지자 그는 할수 없이 학원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일보 보은지사장서 인천지사장으로 발령

그 후 김 회장이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 보은지사였다. 지역의 배달 판매서부터 채곡채곡 경영을 시작했던 그는 그러나 얼마 안가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일보 본사로전격 채용되는 이례적인 사건을 맞는다.
조선일보 인천지사장으로 발령이 나자 그의 인생은 지역에서 전국으로의 폭넓은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세상공부를 가장 많이 한 때가 바로 이때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리고 40세가 되던 해 조선일보를 사직한다.

◇노 정권 때 200만호 주택건설 붐 골재사업 시작

노태우 정권 당시 200만호 사업으로 인한 건설 붐이 일면서 골재파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를 틈타 그는 골재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골재사업을 하려면 산을 구해야 했어요. 산을 구하고자 산주를 찾아 1주일에 2번 씩 1년 동안 108번을 찾아가 뵈었지요. 산주께서는 ‘나중에 벌어서 갚아라’하며 외상으로 내주시더군요. 2년 만에 땅값을 갚았습니다. 인천서구 검단사업장에 건자재 상을 내었어요. 그때 레미콘, 아스콘, 화약, 자동차 판매, 식품 등에 손을 대기 시작 한 겁니다.”

◇고향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금 사업 ‘가장 중요’

무엇보다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보냈던 김 회장은 보은지역에 돈이 없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알토란같은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이었어요. 돈이 없어 수업료를 못 냈어요. 집에 가도 돈이 없고 안가도 돈이 없으니 어느날, 학교에 있는 측백나무를 쳐다보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하소연했어요. 나중에 꼭 돈을 벌어 고통 받는 학생들을 위해 도움을 주자고요.”
연 2회 보은출신 대학진학 자녀 20명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어온 김 회장은 올해 보은장학회 회장직을 맡게 된다. 고향 외에도 그동안 몸을 담고 공부해 왔던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에도 장학금을 기탁했다.
또한 모교인 보은삼산초등 100주년 기념사업회에도 장학기금으로 1억 원을 기탁했다.
보은중 60주년 기념사업회에도 그는 기념횟수에 맞게 6000만원을 기탁할 예정으로 있다.
그가 이처럼 학업과 관련 후학양성에 열정을 쏟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학업에 대한 끝없는 애착 때문이죠. 가정형편이 어려워 마음껏 공부하지 못했던 한을 풀기 위해 작년에 대학검정고시에 합격했어요. 그래서 올해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지요. 중어중문과 1학년에 들어갔어요. 중국문학을 옛날부터 무척 좋아해서이죠. 지난 3월에는 한자2급 시험에도 합격했어요.”

◇내년 중국의 백미 100수의 시 소개 2권 출간예정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의 학구심은 기업에서부터 학문에 이르기까지 중단될 줄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지식욕은 강한 무엇을 갖고 있다. 끝이 없는 그의 향학열은 이번 들어간 중어중문과에 다니면서 내 년 쯤에는 중국의 백미라 일컬어지는 100수의 한자 시들을 추려서 2권의 책으로 번역 출간할 예정으로 있다.
“정말 중국문학에는 아름다운 시들이 많지요. 가히 백미라 일컬을 만큼한 시들이죠. 그 시들 중 100수를 가려내어 책으로 엮을 생각입니다.”

◇지역위한 진정한 일꾼 당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 회장은 “이번 선거에서는 정말 지역만을 위하는 든든한 일꾼이 당선되기를 희망한다”며 “우선 도덕적이고, 말보다는 실천을 먼저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단체장의 기본요건을 거론하면서 지역을 위하는 마음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그는 또 “현재 보은지역에는 발전 성장동력이 매우 부족한 상태”라며 “이를 위해 군 산하에 보은출신 출향인들의 인맥을 모아 군민과 함께 힘을 합쳐 융합해 나갈 수 있는 ‘출향인 전담부서’를 만들어 10만 가까운 출향인들의 인맥 인프라를 형성해 지역발전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가족으로 부인 최문주(45)씨와 선미, 민희, 용희 등 2남 1녀를 두고 있다. 저서로는 '仁光人이 가는 길', '책 속에 길이 있다(1,2권)'가 있다.
언제나 신경영을 위해 역발상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보은 사랑’을 외치는 그의 의지는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고향, 부모님의 정서가 언제나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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