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전통 물려받은 최태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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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전통 물려받은 최태하 가옥
  • 조순이 실버기자
  • 승인 2010.05.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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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면은 보은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19번 국도를 타고 보은에서 영동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 위치한 삼승산의 이름을 따서 면의 이름을 붙였지만, 다른 한편에는 금적산이 있다.
최태하 가옥은 이곳 삼승면 넓은 평야지대인 선곡리라는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데 집의 규모가 매우 크다. 선곡리는 ‘선우실’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이같은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선들이 노닐
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만큼 마을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고 한적한 곳이다.
이곳 선곡리는 원래 화순 최씨의 집성촌이다. 조선 중기 유학자였던 계당 최홍림이 을사사회를 보고 조정에 출사할 뜻을 접고 온 식구를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세거지를 이루게 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곳 보은리 화순 최씨 세거지의 입향조가 되는 셈이다. 지금도 최씨들이 많지만 예전같지는 않다.
이곳 선곡리에는 금화서원이라는 사우가 있다. 이곳에서는 삼지당 최운을 주향으로 하여 남명 조식과 대곡 성운, 동주 성제원, 그리고 계당 등 당대의 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금화서원 안에는 계당이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강학을 하던 장소가 남아있다.
계당은 조선시대 남명의 문인이었던 수우당 최영경의 숙부가 된다. 수우당은 한양에 있다가 남명이 만년을 보내던 덕산으로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인물이다. 수우당은 후에 남명을 배향하는 서원인 덕천서원의 설립을 주도했다. 수우당이 남명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남명과 계당의 교류덕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기록에 다르면 게당과 남명이 만난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던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남명이 보은의 종곡이라는 곳에 은거하고 있던 대곡을 만나러 왔을 때였다. 이 자리에는 대곡외에도 당시 보은현감으로 있던 동주가 함께했고, 자연스럽게 계당도 합류했다.
이때의 만남을 통해 남명이 계당에게 지어준 것으로 추정되는 시귀도 남아있다. 화상현좌라는 시가 그것이다. 현좌는 계당의 아들이다.
특히 남명의 보은방문에서 유명한 일화 하나가 전한다. 즉 남명과 동주가 이 만남에서 1년후 합천 해인사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멀리서 해인사를 찾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간의 교유관계와 약속을 중히 여겼음을 짐작케해주는 얘기들이다.
금화서원의 주향으로 모시는 삼자당 최운은 계당과 같은 화순 최씨로, 기록에 따르면 전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유일로 천거돼 조정에 나가 후에 황간현감에 이르렀다. 유일이란 재능이 있음에도 초야에 묻혀있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삼지당은 기축옥사때 모함을 받아 강계로 추방됐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삼지당 역시 유일로 천거된 것을 보면 학문적 깊이는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금화서원의 건립은 모두 계당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순조때인 1815년 계당의 후손 최덕진과 강재문 등이 주도하고 지방의 유림 105인이 공동발의해 설립됐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17년 지방유림들이 다시 복원했다. 금화서원내에는 계당이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의 이름도 그의 호를 따 계당이라고 붙였다. 계당은 최홍림이 낙향하여 지은 것이어서 금화서원보다 훨씬 앞선 1750년대에 건립됐다.
이처럼 선곡리에 사는 화순 최씨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하면서 지방유림으로 활동했다. 특히 최태하 가옥의 경우 과거 택호로 집을 일컬을 대는 감찰댁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현 소유주의 증조부되는 최익수라는 분의 조선말에 사헌부 감찰이라는 벼슬을 지낸데 연유한 것이다.
현 소유주인 최재덕씨에 따르면 ‘당시 아마도 족히 천석은 했던 것으로 들었다’고 밝힌다. 독립중앙기념관 등에 남아 있는 최태하 가옥과 관련된 당시의 자료들을 살펴보아도 이 집안은 충북 보은에서는 명망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 소유주의 할아버지, 즉 최태하 선생의 아버지되는 최충근과 관련된 편지글 등이 남아 있는데 다른 집안 사람들이 이 집안에 대해 이런저런 부탁을 하는 글들이 여런 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지역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조순이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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