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마자들은 군민들의 욕구와 소리를 들어야”
“유권자들은 정책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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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마자들은 군민들의 욕구와 소리를 들어야”
“유권자들은 정책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져야”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0.03.18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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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민주주의 초석다진 민선군수 역임한 김종철씨
“내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사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공무원 하던 시절 농사의 대한 열망으로 조그마한 땅을 구입해 두었지. 자급자족하는 기쁨이 커. 물론 대추나무도 몇 십 그루 심었지. 3년차가 되는 올해부터는 수확이 재미있을 것 같애.”
민선 1호 초대군수이며 정치원로인 김종철(77) 전 군수는 핑크색 와이셔츠를 곁들인 편안한 양복차림의 영락없는 소박한 시골 할아버지다.

◇쌀농사, 대추농사 지으며 사는 농군인 전 군수

“보은대추는 옛날부터 유명했지. 그러나 품종이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병해충에 대한 방제가 되지 않아 좋은 대추생산을 하지 못한 거지.”
쌀농사 1000평, 대추농사 1500평을 직접 지으며 군수시절 그렇게 열망해왔던 농사에 흠씬 빠져 사는 그는 역시 보통 농부다.

◇관선 끝나고 민주주의 부활로 민선군수 1호 되다

“지난 1995년 풀뿌리 민주주의 부활로 민선군수 1호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였지요. 관선시대를 끝내고 난 뒤의 제도 속에서 민선군수로서 자리매김하는데는 무척 어려움이 많았어요. 늘 지역발전을 위한 계획만을 세우다가 시간을 보냈다는 자책감도 없지 않습니다.”
김종철 전 군수는 초대 민선군수로서 민주적 틀이 잡히지 않았던 정책수행에서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에 특별지시 1호 1주일 내 보은이주 엄명

지난 2001년, 김 전 군수는 ‘특별지시 1호’를 발령, 외지 공무원들에 대해 1주일 내로 보은지역으로 이주하라는 엄명을 내린 것. 그 이유는 보은인구가 줄어 자립기반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당시 동아일보에 ‘엉뚱한 보은군수’로 제목이 달려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김 전 군수는 이 일화로 제주도까지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가 됐다.
이렇듯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인 그는 바로 지난 1995년 민선군수가 되기 위해 과감히 있던 사무관 자리에 사표를 던졌다.
김 전 군수 이후 보은, 옥천, 영동 3군을 통틀어 아직까지 사무관 자리를 내던지고 군수로 출마한 사람은 전무하다.
그 당시에는 민자당의 박준병 의원 등 쟁쟁한 정치인이 많아 감히 정치전선에 뛰어들 용기마저 내지 못할 시기였다고 말했다.

◇영동군청 사무관때 사표 던지고 두 달 반 만에 군수입성

“그때가 94년 3월 20일이었어요. 당시 전 군수와 원만하지 못한 탓에 영동으로 발령 나있던 시절, 나에게 조용히 선거바람을 넣어준 동료가 있었어요. 내속리면의 친구인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일이 터진 거야. 95년 동료들은 모두 복귀가 되었지만 나만 복귀가 되지 못했지. 술좌석에서 농담으로 ‘내가 한번 군수로 나오면 어떻겠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실언이 아닌 실현이 된 결과가 되었던 게지요.”
그리고 두 달 반 만에 그는 드디어 민주당으로 군수 입성에 성공을 했다.
“그 당시 도지부장에는 이용희 의원이, 도의원에는 이향래, 유재철 의원이 있었지요. 나를 합해 일명 ‘야당 세트’라고 불릴 만큼 정치노선과 의사방향이 같았지요.”
‘엉뚱한 군수’ ‘뚝심 군수’로 2선을 풍미했던 김 전 군수는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군청 민원실의 읍사무소 이전을 추진하기도 한 인물이다.

◇국가적 재난사태인 IMF 때 ‘금모으기 운동’ 올인

“국가적인 난국사태인 IMF를 맞으며 전 국가적으로 벌인 ‘금모으기 운동’을 잊을 수 없지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군민들 저마다의 장롱 속에 있는 금을 한데 모아 들고 나왔던 그 시절은 정말 애국이 어떠한 것인지 느낄 만큼 비장함 그 자체였지요.”
농민정책을 통해 보은의 농촌 경제를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말 그대로 과감한 정책에 대한 결실로 이어졌다.

◇3선고지 패배원인은 정책실현에 대한 욕심이 컸기때문

“정책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속리산개발 촉진지구’ 사업이지요. 가장 아쉬웠던 점이 군민들의 의식전환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임기 내에 이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현실적으로는 예산문제 등으로 계획만 세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3선고지 패배원인은 바로 정책 실현에 대한 욕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또 “선배 정치인으로 출마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본인의사보다는 군민의 욕구와 소리를 들어 보은 발전을 위해 정책을 세우는 그런 인물이 필요한 때”라며 “6·2지방선거에 대한 관심과 현명한 유권자들의 판단을 기대 한다”고 말했다.

◇이기주의 팽배는 지역정책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다

지금도 보은의 낙후성에 대해 가슴아파하는 그는 “지역발전 목표에 올인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민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사업을 하더라도 이기주의가 팽배하면 목적한 지역발전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주민들이 어렵더라도 지역정책에 동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보은~청주간 19번 도로사업, 대전~속리산 간 34호선 도로 사업 등이 예산확보로만 이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사업들입니다.”

◇인구감소는 학부모들의 명문학교로의 입학욕구 원인

그는 10여 년 전 보다 현격히 줄어든 보은인구 3만5000명의 인구감소 원인에 대해 “학부모들의 명문학교를 보내고 싶은 욕구가 탈 보은을 하게 된 큰 원인”이라며 “거기다가 요즘은 출산율이 적어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피력한다.
김 전 군수는 현재 생활체육회 게이트볼보은군연합회장과 평화대사보은군협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박경자(73)씨와 3남 2녀를 두고 있다.
'떠나는 보은에서 돌아오는 보은'을 만들자고 외쳤던 팔팔한 군수에서 이제는 77세의 농군으로 돌아가 정치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노 군수의 모습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란 문구가 새삼 떠올려지는 것은 왜일까.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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