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정월 대보름처럼 픙습이나 민속 행사가 많이 있는 명절도 없을 것이다. 요즈음은 많이 잊어지고 있으나 한 해의 복을 비는 것을 비롯하여 무사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여러 가지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부스럼을 예방하기 위한 부럼깨기, 힘을 저축하고 한 해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먹는 것, 아침 일찍 찬 술 한잔을 마시어 귀를 밝게 한다는 귀밝이 술(耳明酒), 그리고 여름 더위를 쫒기 위하여 내 더위팔기. 복을 걸러 담기 위한 복조리, 등은 아직도 흔히 행 해 지고 있는 것 들이다.
지방 마다 차이는 있어도 이 밖에도 윳놀이, 널뛰기를 비롯하여 많은 풍습이 있으나 어릴 때 기억으로는 작은 보름(열나흘)이 되면 머슴들은 이 날 나무를 아홉 짐을 해야 되고 밥도 아홉 그릇을 먹어야 하는데 저녁은 해가 지기 전 일찍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이 날 밤에 동네를 돌며 밥을 훔쳐 먹던 일이다 모두가 먹고 살기 힘 든 때였지만 어느 집에 가면 일부러 밥을 해서 식지 말라고 밥솥에다 물을 데워서 담가 놓고 동네 아이들이 가져가기를 기다렸다가 소두방(솥뚜껑) 여는 소리가 들리면 헛기침을 하여 놀라게 하면 우리는 가지고 간 소쿠리에 얼른 밥을 쏟아 달아나곤 하였다. 또 이 날은 일찍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서 밤늦도록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라디오조차도 잘 모르던 때였으니 어린 내가 늦도록 자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보름날 아침에 일어나니 막내 누님이 너 눈썹이 쇠서 큰일 났다며 어머니를 부르고 야단이다. 어머니도 이일을 어쩌면 좋으냐고 덩달아 걱정을 하시기에 거울을 보니 정말 눈썹이 하야케 되었다. 잘 때에 누님이 밀가루를 반죽하여 칠 해 놓은 것을 모르고 그만 엉엉 울어 버린 적도 있다.
보름날에는 겨우내 가지고 놀던 연을 날리다가 줄을 끊어 날려 보내면서도 아쉬움에 다시 그 연을 잡으려고 쫒아가다가 넘어져 무릎을 깨기도 하였고 저녁이 되면 깡통에 구멍을 여러 개 뚫어서 숱과 마른 나뭇가지를 담아 불을 붙혀 휘돌리며 놀았는데 이것이 쥐불놀이 이다. 커다란 논 한복판에서 아이들이 휘돌리던 깡통을 높이 던지면 쏟아져 내려오는 불꽃은 요즈음 하는 불꽃놀이보다도 더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을 형들을 따라 다니며 냇물을 사이에 두고 횃불싸움을 하던 기억들은 아마도 잊지 못할 어릴 적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월대보름은 풍년과 복을 비는 일이었다. 서낭에 떡을 한 시루 해다 놓고 촛불을 켜 놓고는 마을 어른 한 분이 하얀 미농지조각을 불살라 올리며 집집마다 한 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소제를 올린다. 불살라진 재가 높이 오를수록 기원한 복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별 흥미를 느끼지는 못 했지만 소제가 끝난 뒤 개구쟁이들이 떡을 몰래 가져다가 먹던 일도 생각이 난다.
요즈음은 볼 수 없는 것들이 되고 말았지만 이런 것들이 60여 년 전 나 어렸을 때의 정월대보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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