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올 한해 가장 큰 선물은 둘째딸 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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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올 한해 가장 큰 선물은 둘째딸 출산이었다”
  • 최동철 편집위원
  • 승인 2009.12.3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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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성, 브이 티 탐 부부
▲ ‘예쁜 짓’하려고 얼른 얼굴로 손이 올라가는 윤주다. 낮과 밤이 바뀐 윤아가 사진을 찍기 위해 엄마 품에 안겨 잠자고 있다. 브이 티 탐씨의 아기 안는 자세가 아직은 서툴기만 하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과 새 해 첫 날은 잠시라도 생각에 젖게 한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아갈 것 인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책임과 의무는 다했는가. 아니면 또 회한뿐인가…. 새해 설계는 잘 짜였는가. 희망과 기대는 있는가 등등.
최대성(43) 브이 티 탐(24) 부부도 결혼 후 다섯 번째 연말연시를 맞게 됐다. 지난 한해 이들 부부는 역사가들이 말하듯 참 다사다난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이슈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둘째 딸 ‘윤아’를 10월에 출산한 일이다.
윤아는 아직 목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지만 가족들과 눈을 맞추는 등 집안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가족 간 관계를 화기애애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급부도 있다. 낮과 밤이 바뀌어 있어 낮에는 자고 밤에는 놀자며 칭얼대 이들 부부의 기나 긴 겨울 밤, 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다.
대성 씨는 솔직히 둘째 아이는 남자아이 이길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일인가. 그런데 지금은 윤아와 눈을 맞추다 보면 그런 생각조차가 미안해질 뿐이다. 큰 딸 윤주(3)가 “이마가 제일 예쁘다”며 동생을 쓰다듬어 주듯이 지금은 무엇보다 윤아가 사랑스러울 뿐이다.

# 낮밤이 바뀐 생후 2개월 된 ‘윤아’덕에 밤잠 설치지만 행복 느껴

“겪어보니 말로만 듣던 고부갈등이 진짜 있더라”며 대성 씨가 힘들었던 결혼 초기 생활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듣다보니 그것은 고부갈등이 아니었다. 잘해주려는 시모의 마음이 언어소통 부재와 문화차이로 인해 오해로 빚어진 고부간 어쩔 수 없는 사랑이었다.
대성 씨는 외동아들이다. 어머니 임순례(68) 씨는 속리산 입구에서 기념품 매장과 식당을 운영하며 몇 번의 실패 끝에 대성 씨를 낳아 귀하게 길렀다. 아버지는 9년 전, 7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다 작고했다. 대성 씨는 결국 우리 사회에서 귀엣말로 말하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이 되었다. 한국의 몇몇 처녀들과 맞선을 보았으나 조건들이 맞지 않았다.
2005년 1월 베트남 하노이로 날아갔다. 그리고 몇 차례의 짚고 틀어지는 엇박자 뒤에 드디어 제 박자 ‘브이 티 탐’ 을 만나게 됐다. 당시 대성 씨는 39살이었고 탐 씨는 20살이었으니 교차되었을 설렘과 망설임은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었다.
꽃말이 ‘사랑의 희열’인 진달래와 ‘희망’인 개나리가 속리산의 겨울잠을 깨우는 4월, 탐 씨는 한국에 왔다. 그런데 베트남 제3의 도시 하이퐁에서 살아온 도회지 처녀 탐 씨는 이날 손에 땀을 쥐며 숨을 죽여야만 했다. 어쩌면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떨었을지도 모른다.

# 오해로 빚어진 고부갈등, 허심탄회 대화 나눈 뒤 서로 마음 열어

인천공항에서 청주로 또 보은군으로 이동했다. 이제 다 왔으려니 했는데 이번에는 산길로 접어드는 것 아닌가. 그것도 꼬불꼬불 산길로 자꾸만 들어갔다. 당시 시댁은 만수 리에서 ‘계곡식당’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4월 23일이었어요. 일이 있어 읍내에 나갔다 돌아오니 며느리가 와있었어요.” 시어머니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시모는 며느리 탐 씨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며느리도 귀한 법인데 멀리 외국에서 그 어린 것이 혼자 시집을 왔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한지 한참을 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평소 계획도 있던 터라 며느리가 시집온 지 한 달 만에 식당을 정리하고 현재 살고 있는 보은읍 죽전으로 이사했다.
탐 씨는 곧 첫 아이를 임신했다. 고부간 오해는 이때부터 비롯됐다. 대성 씨가 출근하고 나면 단 둘이 집에 남았다. 탐 씨는 첫 아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인근에 살고 있는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자문을 얻으려 했다. 입덧으로 인해 베트남 음식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시모의 생각은 달랐다. 임신 중에는 몸을 조신하게 다스려야 함으로 외출을 통제했다. 음식도 이왕이면 보양식인 한국 음식을 먹이고 싶어 했다.

# 유독 아빠에 집착 강한 큰 딸 ‘윤주’, 베트남에서도 ‘아빠만 찾다’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이 문화차이와 언어소통 부재로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모의 심술’로 받아들여졌다. 급기야 시모는 통역을 초청해 며느리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시도했다. 오해가 풀렸다. 진실을 알게 되면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유대감은 더욱 강화된다. 그 뒤부터 보은장날 뿐 아니라 평시 외출 때도 고부간 손을 꼭 붙잡고 다니기로 소문이 날 정도다.
탐 씨는 2008년 3월 윤주와 함께 친정집을 다니러 갔다. 한 달 예정이었다. 그런데 난리가 났다. 이틀 만에 윤주가 아빠만을 찾으며 울고불고 했던 것. 대성 씨가 부랴부랴 처갓집에 왔다. 친정에는 목공소를 운영하는 아버지 브이 반 끄앙(48), 어머니 도안티 름(49) 과 학교에 다니는 여동생, 남동생이 있다. 바로 아래 여동생 브이 티 탣(22) 씨는 울산으로 시집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제부는 굴삭기를 3대나 운영하는 사장이다. 내년 3월에는 동생도 출산예정이다.
맏사위가 오자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는 장인은 오토바이에 태워 이곳저곳 하이퐁 시가지를 구경시켜주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딸을 사랑하는 만큼 사위인 자신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방문이었다. 친정에 온지 보름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탐 씨가 참지 못하고 한국 집에 가자고 했다. 시모도 걱정되고 무엇보다 이젠 한국 집에 자신이 가있어야 마음이 편안할 정도가 된 것이다. 누구라도 정 붙이고 살다보면 때와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탐 씨도 이제는 다문화가정을 꾸려가는 명실상부한 여주인이 된 것이다.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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