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삼년산성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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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삼년산성 복원
  • 김인호 기자
  • 승인 2009.11.1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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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이 복원에 실패한 대표적 상징물로 천덕꾸러기가 됐다. 성돌 재질이 본래 것과 다른데다 축성방식도 달리해 새로 복원한 성곽에서는 예스러운 풍취나 그윽함을 볼 수 없다는 자조마저 나온다. 보은군이 지난 2000년부터 종전 복원위주의 정비사업에서 탈피, 부분보수와 붕괴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정비에 포커스를 맞춘 것도 실상 이 때문이다. 사업 초창기 전체 사업계획의 부재와 전문지식의 결여가 화를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국가사적 지정이 요구된다.

글 싣는 순서
1. 삼년산성은 한국의 대표산성
2. 끝 모를 복원 공사
3. 국가사적 지정 필요

▲ 항공에서 촬영한 삼년산성.(사진제공 보은군청)
보은군 어암리 오정산 정상(해발 325m)에 산성이 있다. 신라 자비왕 13년(470년) 삼 년 만에 축성했다고 해 삼년산성이라고 불린다. 이 산성은 신라 성곽의 백미요 한국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받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초기지로 이용했던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고건축학적 가치도 매우 높은 산성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이라면 한국은 삼년산성을 꼽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1천500년이 지나는 동안 풍화에 시달려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진행 중이다. 둘레 1.68㎞, 높이 10~15m, 폭 10m 내외의 석성인 삼년산성은 현재 외부성벽 약 30%, 내부성벽은 보수구간을 제외하고 70% 이상이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문화재청과 충북도 그리고 보은군은 1971년부터 성곽정비사업에 들어가 올해까지 38년 동안 성곽 전면보수430m, 성벽내부 수습보수 200여m, 아미지와 문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탐방로 정비 등의 복원 정비사업을 벌였다. 사업비로는 71억여원을 투입했다. 올해도 사업비 5억원을 들여 남문지 주변의 성벽을 여전히 복원하고 있다.
추가로 오는 2012년까지 5년간 사업비 25억원을 들여 남문지 및 곡성 보수, 성벽내측 수습정비, 편의 시설, 성내 보은사 및 아미지 주변과 동남곡성에 대한 발굴조사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사업의 진척이 더뎌지면서 지금의 삼년산성 복원사업 추진에 회의적인 시각이 나오고 있다.
보은문화원 박진수 이사는 “삼년산성의 정비사업은 종합적이고 정밀한 진단 없이 수해로 인한 피해복구 차원의 석축보강사업만을 진행하고 있다”며 사업방향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항간에도 수십 년 째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에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들이다.
보은군 관계자는 사업과 관련 “문화재 관련 지침이나 자문 등으로 지연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며 “열악한 군 재정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사업비는 복원정비의 사업비는 문화재청과 충북도, 보은군이 국비70%, 도비15%, 군비15%씩 부담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 산성
보은군청을 마주보는 오정산 정상(해발 325m)에 산성은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가 보은의 곡창지대와 사면팔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군사적 입지가 좋은 지형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곳이다. 신라 자비왕 13년(470년) 삼년 만에 축성했다고 해 삼년산성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성은 신라 성곽의 백미요 한국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받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초기지로 이용했던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고건축학적 가치도 매우 높은 산성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이라면 한국은 삼년산성을 대표로 꼽을 정도다.
이곳은 다른 성에서 볼 수 없는 축성술을 볼 수 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의 기초바닥을 산정상 바깥에 잡아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산 위에 또 하나의 산을 만들어 놓았다. 대부분의 산성은 자연석 또는 다듬은 무사석을 이용해 밖에만 성벽을 쌓은데 비해 삼년산성은 안쪽도 구들장처럼 납작한 판돌을 우물정자로 엇물려 쌓았다. 다만 경사가 심한 지형은 밖에만 석축으로 올렸다.
기초를 4중 계단식으로 튀어나오게 해 힘을 받도록 했고, 군데군데 성벽을 반달 모양의 옹성으로 일곱 군데나 만들었다. 이는 성벽에 바짝 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치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동시에 길게 뻗은 성벽을 보강하는 구실도 했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이어지고 골짜기를 감싸안은 포곡식이며, 둘레는 1.68㎞, 높이 10~15m, 폭 10m 내외의 석성이다.
성안에는 수도구 2개가 있다. 동쪽 성벽 지상에서 1m 위에 만든 오각형의 수구는 축성 당시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단양 온달산성의 수구와 함께 삼국시대 고건축을 연구하는 유적의 하나다. 서문에 있던 수구는 홍수로 인해 무너져 원형 파악이 어렵다. 동남북에 성문은 성벽 중간에 위치하도록 했으나, 후대에는 성문을 막은 흔적이 나타난다.
특히 정문인 서문이 1980년 보은지방의 홍수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문에 사용했던 받침대가 드러났다. 오랫동안 묻혀있던 문지방석과 주초석이 발견됐다. 그 중 문지방석에는 닳고 닳은 큰 마차 바퀴자국이 드러나 신라 산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성안 서문 부근 암벽에는 김생의 필체인 것으로 전해지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돼 있다. 특히 아미지라는 연못은 성문 안쪽에 파놓아 적이 쳐들어올 때 방어시설 역할도 했다. 이 연못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1983년의 발굴 때 삼국시대에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의 토기편과 각종 유물이 출토돼 성곽의 기능이 오랫동안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예부터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지로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김헌창의 난 때 거점지로 이용되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918년)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한 때에도 이용된 기록이 있다.
/김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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