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헌, 마르마 칭 파인마 부부
마르마 칭 파인마(27)씨는 그동안 보은군에 주소를 둔 유일의 방글라데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젠 그마저 지나간 전설이 됐다. 지난 6월25일 청주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치러진 한국 귀화시험에 합격, 한국인이 됐다. 칭씨는 이제 수속절차를 거쳐 오는 9월이면 외국인등록증이 아닌 주민증록증을 수령하게 된다. 칭씨는 현재 75세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 김재헌(46)씨, 아들 태형(5)과 함께 삼승면 천남리에서 행복을 가꾸며 살고 있다. # 한국 귀화시험 합격, 9월부턴 진짜 한국인
칭씨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서러움과 어려움도 참 많았다. 알다시피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며, 인구밀도(약 1억5천만 명) 또한 최고로 꼽힌다. 반면 세계 각국 중에서 가장 높은 행복감을 가지고 사는 나라이기도 하다(행복지수 세계 1위). 국교는 이슬람이며, 90%이상이 벵갈족으로서 이슬람 신자들이다. 칭씨는 그러나 방글라데시에서 불교를 믿는(약8%) 미얀마계 소수민족인 무디스다. 미얀마(버마) 접경 지역인 방글라데시 동남부지방 치타공의 카그라차리가 고향이다. 인구 7백만 명의 수도 다카(Dhaka)와는 자동차로 6시간 거리다.
대학을 중퇴한 칭씨는 다카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던 원단염색 회사의 직원이었다. 당시 꽃띠나이였던 향년 18세.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 온 직원 재헌씨와 곧 사랑에 빠졌다. 꽃처녀와 노총각의 열애 4년은 19살이라는 세대차를 극복했다. 임신이 됐다. 혼인신고를 마친 칭씨는 회사 일에 바쁜 남편을 다카에 두고 혼자서 두려운 마음을 안고 2004년 10월 한국에 입국했다. 뱃속의 태형이는 6개월이었다. 시어머니와 단 둘의 한국생활이 시작됐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답답했고, 문화가 낯설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맞는 한국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 남편 없는 2년여 한국생활, 우울증에 시달리다
주위엔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 외로웠다. 시어머니는 혹시 잘못될까봐 바깥출입도 통제했다. 보은장날 시어머니와 손잡고 구경 다니는 게 유일의 즐거움이었다. 태형이를 낳았다. 그리고 한국어 공부에 매달렸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져 온 손바닥만 한 ‘한-방 회화’ 책과 한국 텔레비전을 보면서 외로움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히 한국음식 중 입에 맞는 음식이 있었다. 된장국. 이상하리만치 입에 쩍 달라붙었다. 그 후부터 된장 시래깃국과 김치찌개는 칭씨가 가장 사랑하고 잘 요리하는 음식메뉴가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시 그녀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우울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남편의 9형제자매도 속수무책이었다. 병원에서도 심각성을 경고했다. 할 수 없이 음양묘법의 자연적 치료법을 택했다. 2005년 태형이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다카에 있는 남편을 만나고 고향을 갔다 오더니 우울증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씻은 듯이 나았다. 남녀지간이란 그런 것이다. 보고 싶은 남녀가 서로 보지 못하면 병이 되고 화가 된다.
# 가장 어려웠던 2008년 기나긴 한 해, 이겨냈다
2007년 12월 남편과 함께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철수 했다. 지병인 남편의 허리 디스크가 속을 썩였다. 남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병원비는 들어가는데 수입은 없다. 돈을 벌고 싶었으나 수단이 없었다. 미용사,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고 싶었다. 그러나 간단치가 않다. 그러한 교육기관이 보은군에는 없다. 인근 청주시나 대전시까지 가야하는데 방법이 없다. 그 해 일 년은 정말 길고도 지루했다. 힘들다보니 가끔 고향생각도 났다. 그녀의 부친은 일찍 돌아가셨다. 친정엔 엄마 바이칭과 오빠 단 둘이 있다. 큰오빠는 15년간 경찰을 했다. 그런데 엄마가 몸이 아팠다. 당시로서 병원비를 만드는 방법은 경찰퇴직금을 받는 방법뿐이었다. 지금 큰 오빠는 물장사를 하며 친정집의 가계를 꾸려 나간다. 한국의 여동생을 도와 줄 형편이 못됐다. 이러한 절박했던 심정을 하늘이 알아챘던지 남편의 허리가 정상으로 치유됐다. 그리고 올 해부터 직장을 구해 출근을 한다.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칭씨는 장래를 위해서는 이런 때일수록 뭔가 준비하거나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용, 요리 자격증 취득이 첫 번째 목표다. 두 번째는 방글라데시를 남편과 함께 오가며 할 수 있는 소규모 무역, 즉 보따리 장사다. 남편도 8년이나 다카에서 생활했고 자신도 방글라데시의 속성을 다 알고 있으니 무엇이든 하면 될 것만 같다.
# 한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차이, 에피소드
칭씨는 한국어, 영어, 벵갈어, 힌두어(인도), 미얀마 부족어 등 무려 5개 국어를 구사한다. 아들 태형이도 다카에서 3살 때까지 살아 영어를 곧 잘 한다. 그래서 지금 유치원에 가면 인기스타다. 또래 친구들의 영어회화 선생이기도 하다.
그녀가 한국문화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인사법’이었다. 매일하는 아침 인사, 나갔다와서 하는 인사 등 동일인에게 눈만 마주치면 하루에도 몇 번씩(매일 보는 사람끼리)하는 인사가 정말 이해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정말 힘들게 한국식 인사법을 익혔다.
한편 얼마 전 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남편의 옛 직장동료들 부부 7쌍이 밤을 새우다시피 놀다간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 남편이 방글라데시 사람과 결혼했다고 자랑하자 친구 부부들은 ‘피부가 까무잡잡한 ’대부분의 방글라데시인들만 생각하고 ‘측은지심과 호기심’을 갖고서 방문한 듯 했다. 그런데 “젊음과 미모와 애교스러움에 깜짝 놀라 남편 친구들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더라”는 식의 뜻이 내포된 칭씨의 자화자찬 성(?) 발언을 듣다보니 그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은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센터장 박달한) 황화연 사무국장도 “칭씨는 재주도 많고 무척 똑똑하며, 박학다식 하다”고 칭찬할 정도니까.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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