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의 아픔 딛고 일어선 살기 좋은 충효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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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의 아픔 딛고 일어선 살기 좋은 충효의 마을 
  • 류영우 기자
  • 승인 2009.03.07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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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풍취리(158)

날이 많이 풀렸다. 따스한 햇볕과 맑은 하늘이 이제 완연한 봄인가 싶다. 보은읍 풍취리를 찾은 5일에는 봄을 재촉하는 반가운 봄비도 내렸다.
바람부리, 진설미, 그리고 마리뜰. 풍취리를 이루는 세 개의 자연마을이다.
“우리 마을 풍취리는 북으로는 배산이 감싸고, 서로는 넓은 동안이 뜰이 있고, 남으로는 풍취천의 맑은 물이 흐르니 천하의 명당이라.”
풍취리 마을의 관문인 마리뜰까지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이어진 논과 밭들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채 촉촉이 젖어들었다.

#옛 이야기 속으로...
삼년산성을 마주한 위치에 있는 영산을 배산이라고 했다.
보은읍 풍취리는 이 배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풍취리 마을 주변에서는 신석시 시대의 간석기와 신라 전후기의 토기류들도 발견이 됐고, 옛 주거지 터에서는 와당과 청자, 백자의 파편들도 발견된다고 했다.
그만큼 마을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암시한다.

마을에 대한 옛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경상도의 조세와 문물, 그리고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과객들이 청주목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 바로 풍취리라는 것이다.
근래에 까지도 이들이 쉬어갔다던 주막거리와 마방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도 예쁜 마을이름
풍취리는 크게 세 개의 자연마을로 나뉜다.
보은읍을 중심으로 첫 번째 마을이 마리뜰이다.

보은-내북 간 4차선 국도를 경계로 진설미 마을이 있고, 속리산 방향으로 맨 끝마을이 바로 바람부리다.
예쁜 마을 이름처럼, 그 속에 담기 의미 또한 다양하다.

먼저, 바람부리는 세조대왕이 드신 샘물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조대왕이 속리산 대궐 터에 머물 때 이곳의 샘물을 날라 마셨다고 한다.
물을 뜨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 하인들의 연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을이름이 바람부리가 됐다는 것이다.

진설미의 다른 이름은 진선미다. ‘배가 나아가는 꼬리’라는 뜻이다.
지형적으로 ‘배가 나아가는 꼬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진선미라 불리었지만 주민들에게는 다른 의미도 전해지고 있다.

“진설미 마을은 장꾼들이 고개를 넘는 길목에 있던 마을입니다. 걸어서 고개를 넘기 전에 항상 들리던 마을로 장꾼들에게는 ‘질러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장꾼들에게는 ‘질러서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진설미라고 불렸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정각(80)씨가 들려 준 이야기처럼, 진설미 마을 앞에는 19호선 국도가 시원하게 뚫리게 돼 옛날 장꾼들의 얘기처럼 ‘질러서 가는 길목’이 됐다.

#비옥한 경작지 마리뜰
사방이 비옥한 경작지로 농사하기 편해 곡식 생산량이 많아 부자 마을이 됐다는 마리뜰.
마리뜰은 곡식이 많이 생산된다 하여 두평리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마리뜰이라는 이름을 얘기하는데에 있어 넓은 논 가운데에 위치한 말 무덤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성이었고, 보은읍 산성리에 있는 백봉산성은 백제의 성이었습니다. 마리뜰의 넓은 땅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곳이었으며 이곳에 전쟁에서 죽은 말들을 묻은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5평 이상 될 만큼 큰 무덤이었는데, 30년 전 경지정리를 하면서 이 말 무덤을 없애고 농사를 짓는 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 무덤을 없애면서 그 집에 우환이 들자 논 가운데에 다시 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리뜰은 옛날 전쟁 중에 죽은 말들을 묻어 둔 말 무덤이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이상호(76)씨의 얘기다.

경지정리로 없어졌던 이 말 무덤은 현재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이 돼 논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람부리, 진설미, 그리고 마리뜰.

이 세 개 자연마을과 함께 풍취리는 1980년 보은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여 만든 ‘복동’마을도 함께 품고 있다.

#충효의 고장 풍취리
오래된 마을의 전설과 함께 충과 효는 풍취리의 가장 큰 자랑이기도 하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유은식씨는 중풍으로 고생하는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셔 효자상을 받는 등 풍취리가 효를 실천하는 마을로 알려지는데 기여했다.

이밖에 이태희 이장은 마을에 혼자사는 노인이나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을 먼저 살펴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으며, 마을 젊은이들로 구성된 상조회는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내일처럼 참여해 경로효친 사상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국가유공자들도 6명이나 거주하고 있다.
최창래, 장두만, 고일우, 전상철, 권상호, 서정각씨가 바로 그들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내일처럼 도와주는 젊은이들이 있는 마을이 바로 풍취리다.

#수해의 아픔 딛고 일어선 마을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풍취리지만 여느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둥구나무를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풍취리다.

마을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 없다는 것이 풍취리 주민들의 아쉬움이지만 여기에는 수해라는 아픈 과거를 함께 간직하고 있다.

서정각씨도 수해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올해 내 나이 80. 지금까지 기억나는 수해만도 대여섯번은 돼. 80년대 수해때는 마리뜰 사람들이 물을 피해 진설미로 피신한 적도 있어. 그때 토담집이었던 주민들은 넘치는 물에 집을 떠나보냈고, 다시 집을 지어야 했지. 나 어릴때만 해도 50년 이상 된 나무들이 많았지만 물에 잠기면서 다 죽었지.”
어려움을 딛고 주민들은 다시 제방을 쌓았고, 이제는 저수지가 무너지지 않는 한 수해의 피해를 당하지 않을 안전한 마을을 건설하게 됐다.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지만 80년대, 그때처럼 비가와도 이제는 견딜 수 있을 겁니다.”
수해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던 풍취리.
하지만 이제는 물을 다스릴 수 있게 된 마을로써, 옛 수해의 아픔은 아득한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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