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주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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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주역(3) 
  • 송진선 기자
  • 승인 2008.12.0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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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복천암의 대승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속리산을 훈민정음으로 고을로 만들자는 주민들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보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하고 훈민정음 마을이 만들어지길 고대하면서 지난 8일 속리산 수정초등학교에서 한국 세종한림원장 강상원박사가 발표한 저서 ‘세종대왕창제주역훈민정음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 중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었다는 부분을 발췌해 게재한다. 다만 서책대로 훈민정음 표기법을 그대로 준용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신미대사 대사가 비밀리에 세종대왕을 보필해 훈민정음을 창안했다고 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음양오행과 칠음에 근거한 자모가 정확히 실담어의 자모와 동일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예컨대 9세기경 일본의 승려 국까이와 사이초가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천태학(天台學)과 실담어(悉曇語)를 배워가지고 일본에 돌아와 실담어 알파벳에 근거하여 일본글자인 '가나'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타스님이 소장하던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바 그 간기가 정통3년(正統三年) 천불사(天弗寺)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원통선종석보에 의하면 정통11년 보다 8년전에 이미 훈민정음이 창제돼 글자의 정밀성과 효용성을 시험하기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원각선종석보인 불경언해(佛經諺解)를 간행했던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는 한편으로는 집현전 학자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미대사와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소헌왕후, 부마 안맹담 등이 주축이 돼 별도로 추진한 것으로 해석된다.

위에서 말한 원통선종석보는 시험적으로 언해한 문장으로 쓰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석보에 기술한 표기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와 비교하면 저자가 동일한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그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왕조실록에 의하면 '문종 즉위년 7월8일 장령 하위지가 신미에게 승직을 내리는 것을 불가함을 아뢰다. “신미에 대한 칭호는 선왕께서 정하신 것이다. 다만 미령(未寧)하심으로 인해 시행하기 못했을 뿐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주자소는 혁파한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문종이 신미대사에게 내린 혜각존자 시호는 선왕께서 미리 정한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세종과 문종이 무엇 때문에 신미대사를 왕사격(王師格)으로 공경하였겠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신미대사가 실담어에 정통해 훈민정음 창제를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대석학(大碩學)으로 인식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의 대의(大意)가 불쌍한 백성을 위해 베풀어 주신 민본정책이다.

그러나 모화사상에 젖은 유신들은 깨닫지 못하고 정음을 언문이라 비하하며 정음창제 자체를 극력반대하면서 신민대사를 비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의 뜻을 지척(指斥:웃어른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함)하는 상소만을 일삼고 있었다.

정음창제를 통해서 명나라로부터 자주독립을 수립코자 하신 세종대왕의 정책은 유신들의 모화사상(慕華思想)과의 대결양상으로 해석된다. 더구나 신미대사에 관한 공적을 유신들이 왕조실록에 기록했겠는가.

그러므로 왕조실록은 신미대사의 업적에 관한 기록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실록의 진실성을 상실케 된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 전란,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이 탈취하여 결여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할 때 기록이 소실 또는 상실되었다고, 역사적 사실자체의 존재마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다행히 문종실록에 의거해 신미대사가 정음청 학사라는 기록을 찾아내게 되고 실담 50자문을 당나라 때 지광선사(智廣禪師) 이후 1500여년만에 본 필자가 실담 오십자문(五十字門)에 상세히 주석을 가해 실담어의 음운과 불휘(根)가 우리 토속 사투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어 훈민정음 창제의 근원을 확증케 된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의 정통토속 음운에서 실담어의 뜻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과 실담어의 구조와 표기법을 대조하며 신미대사의 불경언해(佛經諺解)와 용암화상(龍巖和尙)의 실담해의 총론에 기록된 실증자료인 '범본오십자실담장(梵本五十字母悉曇章)'을 참고해 정음창제의 원리를 해석한 것이다.

왕조실록에 신미대사에 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실담어이 음운(音韻), 육서략(六書略)의 칠음서(七音序)에 의한 ‘·, l, ㅡ’삼재(三才)의 근원을 찾아냈으니 ‘·주켧, l袞곤, ㅡ일’삼재가 바로 자음과 모음이 가획원리(加劃原理)에 따라 창제되는 이치에 통철한 학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미대사라고 확인하게 된 것이다.

실제 정음표기법과 운용법칙과 신미대사가 언해안 문장을 보여줌으로써 정음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天, ㅣ人, ㅡ地’ 혹은 실담 칠음서의 ‘·주주, l袞곤, ㅡ일’ 삼재의 교합에 의해 창제된 자모의 합용병서로 초성과 종성에 표기할 때 실담어의 어원이 나타나게 된다.
‘·ㅣㅡ’삼재는 정음창제에 있어서 최고의 근본법칙이다. 이와같은 합용병서의 교합은 실담어에 정통하지 않으면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미대사는 실담어에 정통하고 실담 ‘·주주, l袞곤, ㅡ일’ 삼재에 정통했기 때문에 가획하여 자모를 만들 수 있게 되어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할 수 있는 것임으로 확인한다.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해동명신록에 보면 '웅문거필일세무적(雄文巨筆一世無敵)'인 신미대사가 주역으로 세종대왕을 보필해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했음이 확인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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