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단상(短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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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단상(短想)
  • 보은신문
  • 승인 1996.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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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춘자(학교어머니 연합회장)
초가을 햇살이 완연한 오후였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무언가 성에 안차는지 노트 몇장을 북북 찢어버린다. "넌 아껴쓸 줄도 모르니!" 라고 한마디 했더니 엄나는 학교 다닐때 그런일이 없었냐고 오히려 따지고 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그나이 또래가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있는대로 깔끔을 떠는 시기일 것이다. 내 어린시절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글의 내용이 마음에 안들고, 글자라도 지저분하면 이내 노트를 뜯어내고는 첫장부터 새로이 시작한다면 다시 써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지저분한 노트 몇장을 찢어 버리다 보면 어느새 그만큼의 쓰지않은 말끔 한 장마저 떨어져 결국 한권을 아예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어느새 40줄 학부모가 되어버린 지금, 딸아이의 그런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만그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애써 쓴 몇장의 노트가 아까와서도 말끔한 노트마져 떨어 질세라 조바심이 나서도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추억들이 하나하나 쌓이는 나이가 되면서 삶은 오히려 한권의 노트와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 때문이다. 너무 깨끗하고 완벽한 것보다는 다소 너져분해도 넉넉함이 더한 쪽… 한장의 낱장이라 할지라도 그속엔 사색의 흔적과 고민이 담겨 있고 그것이 하나둘 착곡차곡 쌓이다 보면 무엇보다 소중한 생의 노트가 되는 것이다 나에겐 결혼하면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오기 시작한 가계부가 인생의 노트와 같다.

어린시절의 깨끗하고 얄팍한 노트에 느끼는 정보다는 10여년을 함께해온 손때묻은 가계부, 그 나름의 수고에 더 큰 정을 느낀다. 한장 한장 낱장의 글이 모아져 한권의 창작물이 태어날 수 있듯, 하루하루 써나가는 가계부에서 난 내 인생의 흔적을 느끼게 된다.

내나이 40! 아직은 어린터가 벗지 못한 맑고 귀여운 딸아이가 있고 살아가야 할 세월이 살아온 만큼 남아 있다. 이젠 겉으로 드러나는 소소한 즉각적인 반응보다는 잔득하니 이겨내는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세월을 겸허히 배우면서 그속에 숨어 있는 깊은 향기를 찾고 싶다. 한뼘은 더 성숙한 딸아이와 함께 말이다.


<생각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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