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의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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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의 유감
  • 보은신문
  • 승인 1996.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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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중부매일 논설위원)
보은읍 어암리에 있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은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성(城)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고성(高城)이다. 동국여지 승람 등 고문헌에는 오정산성(烏頂山城), 오항산성(烏項山城)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년산성이라 불린다.

내 어릴 적 삼년산성은 단골 소풍코스였다. 아끼낀 성돌 틈을 뒤지며 보물찾기를 하고 '장수골'이라 불리던 곳을 기어들며 담력을 겨뤘던 추억이 아련하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장수가 살았다고 하고 또 백년묵은 지네가 나온다고 했다.

촛불이나 플래쉬를 들고 10여m쯤 기어들다 바람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뒤돌아 나오곤 했다. 뒤에 안일이지만 이 장수굴은 성의 배수구였다. 배수구는 동쪽과 서쪽에 있었는데 서쪽에 있었는데 서쪽 배수구는 토사에 밀려 없어지고 동쪽 성벽에 있는 배수구는 지금도 잘 남아있다. 성 주변에는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옛날 무덤에서 나온 그릇으로 알았다.

어암리 일대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꾼의 도굴침을 수도 없이 맞던 곳이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천년 고성은 그런대로 유지해왔다. 곳곳이 허물어지긴 했어도 삼년산성 성벽에는 천년의 신비와 채취가 숨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성은 급격히 쇠락했다. 그 오랜 세월을 견뎌온 성벽이 쇠락의 속도를 빨리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비단 비 바람만이 원인은 아니었으리라.

이곳을 찾는 행락객들이 성을 아끼지 않았고 더러는 그때 불어닥친 새마을운동으로 귀중한 섬돌이 축대를 쌓는데 이용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뒤늦게나마 성의 소중함을 인식하여 엄청난 예산을 들여 옛모습을 되살려놓았는데 그게 진정한 옛모습이 아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성의 복원에 관계당국은 최선을 다했겠지만 복원된 성은 어딘지 모르게 시멘트 문화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이곳저곳을 기워놓은 석재는 원래 현장에 있던 점판암이 별로 없고 타 지역에서 반입된 석래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지런하게 이발을 한듯한성의 모습은 정돈된 맛은 있으나 고졸(古拙)한 옛맛은 어느새 증발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성이라기 보다 새마을 담장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복원된 성은 내 어릴 적 놀던 그 모습이 아니다. 문화재는 '복원'보다 더 허물어지지 않도록 '보존'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생각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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