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정신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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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정신을 잊지 맙시다
  • 송진선
  • 승인 1992.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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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석씨의 일본 제국주의 증언
고명아들도 태어나 일찍 장가를 가서 부모와 처와 함께 행복하게 살던 홍종석씨에게 21살때인 43년 가을, 강제 징집 통지서가 날아왔다. 징병으로 끌려가면 살아오지 못한다는 말에 평양으로 도망갔고, 병기창에 취직하면 징병이 안될 수도 있다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병기창에 취직했으나 전국에 수배되어 결국 징병을 당하고 말았다.

부모, 처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한장만을 품속에 간직한 채 훈련도 받지않고 일선에 배치된 홍종석씨는 일본인 부대(아라시부대)에 소속돼 중국으로 향했다. 밤낮보행으로 압록강을 건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화물차에 탔고 소속중대에는 3명 정도의 한국인이 함께 배치되어 친형제처럼 지냈다.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인을 '장꼴레'라고 불렀는데 어느날 중국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 앞으로 걸어오고 있어 '장꼴레 온다'고 수군대자 바로 자신은 학도병으로 끌려온 한국인이라고 밝히고 반가워하면서 "너희들은 지금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함락시키기 위해 가는 것"이라며 "어차피 죽을 목숨 일본부대에서 탈출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광복군에 귀속하라"고 조언했다. 그의 말을 명심하고 탈영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홍종석씨는 중간 체류지였던 장사 지역에서 종군위안부로 처참하게 살고있는 한국여자들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다시 한 번 느끼며 탈출계획을 확고히 다졌다.

비행기 폭격때문에 밤에만 행군했던 부대는 드디어 최전방인 보경에 닿아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홍씨는 중국어를 쉽게 배워 소대 통역병으로 일해 부대의 신임을 얻고있던 터였다. 그러나 부대가 야행에 들어갔을 때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용변을 본다며 행렬에서 뒤로 처지는 등 두번 정도 탈출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해 그들에게 끌려다니며 비참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종전소식이 들렸고 대한민국이 행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향으로 간다는 기쁨에 먹지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고 천리길을 걸어도 다리아픈 줄을 모르며 고향길에 올랐다. 그런도중에 광복군을 편성한다는 말을 듣고 광복군에 지원, 광복군에 지원, 광복군 2지대에 소속되어 광복군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 해야 할일 등의 교육과 나무총으로 군사훈련을 받고 광복군 노래를 제청하는 등 해방을 맞은 나라의 재건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여기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인과 싸워 많은 승리를 거둔 이청천 장군도 만났고 임시정부 요원들도 많이 만나 그드르이 위로와 격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염병보다 무서운 질병이 돌아 광복군 7백명중 3백여명이 이로인해 죽었는데 임시정부에서 자금을 지원해줘 홍종석씨 등 동료들은 중국의 한양 뒷산에 10여평정도 되는 큰 웅덩이를 파서 모든 시신을 묻고 '대한 광복군 영령지구'라는 표석을 세웠다. 이때 그 자신도 무서운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홍종석씨를 반기는 것은 외아들을 징병으로 보내고 화병이 나 타게한 아버지의 위패와 아들 걱정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몸져누운 어머니, 그리고 생계를 위해 고생한 부인의 설움받친 눈물뿐이었다. 가족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삼켰다는 홍종석씨가 해방후 47년을 맞은 오늘 비로소 털어놓는 말은 "그때의 항일 독립정신을 잊어서는 안되고, 되도록이면 일본물건을 쓰지말며 반드시 일본보다 앞서는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면서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인간다운 삶조차 빼앗았던 일제에 의해 우리민족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오늘날 일본풍조를 무분별하게 쫓아가는 청소년들이나 일제 상품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일부 몰지각한 부유층 인사들의 행위를 보면 정말 같은 민족이지만 경멸하고 싶다"고 울분을 터뜨린다.

현재 탄부면 장암리에서 창고업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홍종석씨는 그래서 3남2녀의 자녀들 중 무역업을 하는 탓에 일본을 자주 오가는 세째 아들에게 절대 일본인에게 아부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현재 그는 장남이 중국에서 한중 합작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 강제 징병을 당해 갖은 고생을 겪고도 결국은 고향이 아닌 이역만리 타향에 몸을 묻은 한양의 광복군 합동묘를 참배하고 그드르이 넋을 위로하며 실컷 울고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그는 관광을 위해 중국을 찾는 우리 국민들이 다른 곳은 몰라도 광복군의 합동묘소를 꼭 참배했으면 좋겠다고 당부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민족은 언제 어려운 시절이 있어나 싶을 정도로 현재의 경제력에 만족해 흥청망청 하고 있는데, 나라를 빼앗겼던 아픔을 되살려 국민화합으로 경제성장은 물론 통일을 앞당겨야한다"는 숙제를 후세대들에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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