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공비출몰 잦았던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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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공비출몰 잦았던 보은
  • 보은신문
  • 승인 1992.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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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 지역사수 위해 싸워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남침야욕을 품고있던 북괴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하면서 한국전쟁은 발발했다.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들어와 한반도의 적화가 눈앞에 다가와 있을때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대세는 뒤바뀌어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본대에 합류에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은 산속으로 들어가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하려고 민가를 습격하거나 관공서를 공격했다.

우리 지역에서도 험준한 산악을 끼고 있는 마을들은 이들 공비로부터 항상 위협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속리산으로 숨어든 공비들이 산에서 생활하며 인근 주민들의 쌀, 보리는 물론 생필품과 소, 돼지를 잡아갔고 무자비한 폭행과 인명살상도 서슴치 않았다. 내속 대목리, 묘막리 등이 피해가 컸으며 사내리, 민판동(수정국교 뒷편), 지서가 있던 상판리까지 출몰해 주민들을 불안케 했다.

이에 지역 젊은이들이 지역사수청년단을 만들어 경찰과 함께 자구책을 마련하기에 이르렀고 주민들도 공비출몰 사실을 위험을 무릅쓰고 알려주었다. 51년 5월 중순경 10여명의 청년들이 사내리를 수비하러 나갔을 때의 일이다. 민판동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보니 공비출몰을 알리려고 달려오던 주민이 공비들에게 맞아 머리가 깨지고 가슴에 칼을 맞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공비토벌에 나서기로하고 사람들을 모집하니 즉 각 11명의 청년이 나섰다. 산돼지 사냥꾼을 비롯해 버섯을 채취하던 사람, 나물 캐던 사람 등산의 지리에 밝은 이들로 구성되었으나 거의가 전투경험이 없었다. 그중 경험있는 김종섭씨(현재 77세)가 대장으로 뽑혔다. 산돼지 사냥꾼인 박노식씨(현재 71세)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유모씨가 자원했다. 공비토벌에 대비해 몇번 총을 만져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속리산 속 어디에 어떤 나무가 있고 바위모양까지 아는 이들이라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첫 출동은 6월초로 결의됐다. 새벽3시경 사내리를 출발 법주사 뒤를 돌아 계곡을 올라갔다. 외석문 근처까지 전진했을때 포수인 박씨가 경계를 주었다. 매복을 하고 귀를 기울여 보니 그릇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대원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김대장의 지시에 따라 포위하기로 하고 대원들을 배치했다. 잠시후 야영에서 깨어난 10여명의 공비들이 계곡물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경험많은 김대장도 긴장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원들의 독려에 이윽고 방아쇠를 당겼고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공비들은 혼비백산하여 총과 식량 등을 전부 버리고 도망쳤다. 여기서 공비사살 4명, 소총 5자루와 따발총 2자루 획득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부대 공식명칭도 없이 오직 내가족을 지키고 속리산을 지키는 유격대였다.

이후 특별유격대라 호칭되었고 속리산 곳곳을 쫓아다니며 공비토벌에 전력, 회인, 용화 등지에서 원병도 요청받아 출동하여 싸우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50년 10월 경 유엔군이 가담해 서울이 탈환되고 인민군이 밀리면서 일부가 국사봉 줄기를 타고 북상중 탄부면 상장리를 지나고 있었다.

새벽 4시경 마을과 좀 떨어진 송삼분씨(현재 85세) 집에 인민군들이 닥쳤다. 아침밥을 지으러 밖으로 나오는데 산비탈을 타고 내려온 20여명의 인민군들이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먹을 것을 달라는 이들을 보고 송씨는 놀랐으나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각방으로 모두 들여 보냈다. 자식과 노모가 있어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송씨는 태연한 척 아침밥을 짓고 군불도 때주며 안심시켰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방문을 열어보니 행군에 지친 몸이라 인민군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송씨는 인민군들이 자는 틈을 타 힘껏 마을로 달려가 집에 인민군이 있다고 이장에게 전하고 되돌아 왔다. 인민군이 눈치챌까봐 밭에서 배추를 뽑아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잠에서 깨어난 장교인 듯한 군인이 어디갔다 오느냐며 눈을 부릅떴다. 송씨는 얼른 밥 해주려고 배추 뽑아온다고 둘러대었다.

점심까지 배불리 먹은 인민군들이 떠난다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송씨는 저녁을 일찍 해줄터이니 먹고 가라며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고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청방대원들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한편 이장으로부터 신고를 접한 경찰과 청방대원(대장 전재식)들은 즉각 출동하여 집 주위 골짜기에 포진하고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송씨집에 일제 사격이 개시되었고 방에 있던 인민군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총을 버리고 투항했다. 이 와중에 송씨 식구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10여명을 사로잡아 외속·마로·탄부지서에서 각각 나누어 끌고 갔으며 3일후에는 미군과 국군이 마을에 도착해 계곡에 남아있던 예닐곱명을 더 잡기도 하였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 마을의 주민 이동국씨(당시 12세)는 "그날경찰과 청방대원들이 잡은 인민군중에는 여군도 몇명 있었다. 잔당소탕때는 한명이 울타리 나무더미에 숨어 이는 것을 잡았는데 그 속에서 밤을 얼마나 먹었는지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산외면은 거의가 산악지대로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비의 출몰이 잦아 마을과 지서를 습격하는 등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찌기 산외면내에 1개중대 병력의 대동청년단(단장 이한기)이 조직돼 공기출몰 지역을 방위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북진이 진행되던 10월경 이들은 최남규씨(현재 69세, 산외 이식)를 대장으로 한 국민방위군으로 재편되어 본격적인 공비토벌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방위군은 구식총 4정을 받아 1개 소대씩 나누어 움직였는데 낮에는 경북 용화까지 토벌을 나가고 밤에는 지역으로 돌아와 주민을 보호했다. 특히 이열우씨(현재 66세), 안보생씨(현재 67세), 최규만씨 등이 소속된 소대의 활약이 돋보였다. 1·4후퇴 당시 공비들이 지서를 습격해 지서가 공비들에 넘어갔었다. 이때 안보생 대원은 과감하게 소대를 지휘하며 지서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밤에 공비들의 허점을 찾아지서 창문밑까지 접근한 안대원은 지서내부에 손들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에 공비들이 밖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안대원은 창밑에 숨었다가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지서안으로 던진 후 빠른 동작으로 자리를 피했다. 공비들은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쳐나와 뿔뿔이 도망쳐 갔다. 안대원은 여기서 큰 공을 세웠으나 동생 안정상씨를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한번은 용화에 공비습격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출동했지만 이미 속리산 절골마을로 떠났다는 소식만을 접했다.

이들을 쫓기로 하고 산길을 지나 절골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공비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이 밥을 먹고가라고 붙잡았다. 새벽출동이 어서 대원들 모두가 끼니를 거른 상태였다. 대원을 반으로 나누어 교대로 식사와 보초를 서기로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락에 총소리가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다급해진 대원들은 식사를 하려다 산속으로 뛰었고 능선에서 경비중이던 대원들이 공비들과 총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공비들이 대원들 쪽으로 좁혀오기시작했다. 3~4백명은 족히 되어 10여명으로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므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빗발치는 총알사이로 후퇴해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니 몇명의 대원이 보이질 않았다.

신원, 계원, 구티를 넘어 밤에야 마을에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최규만 대원이 전사했고 강한석 대원이 대퇴부 관통의 중상을 입었으며 김기운 대원은 총알이 식도에서 폐까지 관통하였으나 살아 있었다. 특히 최규만 대원은 끝까지 싸우다가 공비들의 창에 찔려 전사한 것이 확인되어 대원들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대원들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용화, 신정, 속리산 등을 쫓아다니며 공비토벌에 나서 성과를 올리며 지역을 사수하였고 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후에도 산외지역에 1개 소대 병력을 계속 유지시키면서 잔당들의 습격을 막으며 주민들을 보호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우리지역을 사수하고 내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하게 뛰어들었던 우리의 청년들. 이때 전사한 경찰 및 청년단원의 뜻을 가리고 이어받기 위해 보은읍 학림리에 38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반공대원 충혼비가 건립되었고 지금도 이들의 뜻을 받들어 추모의 발길이 항상이어지고 있다.



-취재에 협조해 주신 한경호 상이군경회 군지회장, 김도식 무훈회장, 유승태(산외 구티), 이열우(산외 장갑), 유병택(괴산군 도안우체국장, 탄부 상장1구), 이동국(탄부 상장1구)씨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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