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의 추억이다
움츠리던 겨울이 꼬리까지 거두어들인 3월 끄트머리쯤 되니 할미들도 기를 펴고 삽짝을 열어 재낀다. 팔순이 알찐거린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에겐 온 세상이 놀이터 아닌가.
한때는 세상을 황금 쟁탈의 전쟁터로 삼았던 동갑 친구들이 2박3일 예정으로 봄나들이를 나섰다. 동계 올림픽으로 인해 아파트형 리조트가 많이 등장한 평창이다. 원주의 단골 꽃게장 집 ‘훈이네 꽃게’에 들러 만족한 입맛을 즐기고 소금강을 거쳐 숙소에 도착한 첫날밤, 누구의 목소가 더 큰가 시합하듯 한참을 떠들다가 다들 촐촐해 졌는지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먹거리로 바뀌었다. 내일로 예정 된 쑥버무리가 인기 1위다.
둘째 날, 강릉 주변을 관광 하던 중 점심때가 되었으니 어디로 갈까 너도나도 휴대폰 들고 맛집 검색하고 있는데 마침 지구대 마당에 연세 좀 있어 보이는 경찰 분이 계셔서 무조건 들어갔다. 차가 들어오니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는 그분 곁으로 가서 “충청도서 왔는데 맛집을 찾는 중입니다.” 빙그레 웃음기를 띄우시며 정문 쪽으로 나오셔서 “여기서 똑바로 백여 미터 못가서 ‘순이네 장치조림 집’이 있어요. 조림으로 선택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시간이면 거기 주차 못하니까 차는 그냥 여기 두고 가세요.” 친절한 경찰아저씨의 도움으로 다시 찾고 싶은 맛난 점심을 즐겼다. 난생 처음 접한 장치가 어떻게 생겼나 검색해보니 물 명태처럼 생겼는데 명태보다 길다. 친구들이 다 처음 본단다. 느닷없이 지구대로 차가 들어가서 놀란 친구들이 맛난 점심 잘 먹고 주차 고생도 없으니 나의 엉뚱함에 고맙다고 한마디씩 한다.
배도 부르고 강릉 부근 관광은 거의 다녀 본 곳이라 별 관심 없는 듯 오면서 눈도장 찍어 둔 쑥밭으로 가잔다. 꽃바구니가 아닌 검정비닐 봉지와 늙은 과도를 하나씩 들고 본격적인 봄나들이 쑥 밭에 옹기종기 앉았다. 용평 스키장 케이블카는 취소하잔다. 아직 이른 탓인지 쑥이 어리지만 각자 한 봉지씩이다.
계획했던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도 양떼 목장도 설렁설렁 거치고 안반데기 마을을 지나고 산을 넘어 숙소로 오자마자 다듬고 씻고 난리다. 마지막 헹굼 물에 소금을 넣어 건져서 준비해온 쌀가루에 버무려 이미 물이 끓고 있는 찜통으로 모셨다. 다된 쑥버무리를 꺼내고 또 한 찜통 앉혀놓고 먹다보니 두 번 째 것이 익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젓가락 빨며 서로 쳐다보고 깔깔 거리고 웃다가 두 번째 것도 꺼냈다. 원래는 남는 쑥은 내일 아침에 국 끓여 먹기로 했는데 그것마저 쌀가루를 뒤집어쓰고 찜통으로 들어갔다.
배부르도록 먹은 할미들은 다시 검은 봉지 들고 숙소 둘레에 늘어진 철조망 밑으로 기어 들어가 빈 밭에 앉아 아침 국거리 마련에 하하 호호다.
마지막 날, 스키 철이 아니라 예약 없이 발왕산 케이블카를 타면서도 쑥이 있나 살피는 친구 때문에 또 한바탕 웃는다.
2024년을 보내며 연말 모임에서 친구들은 2년 전의 쑥버무리 추억을 꺼내놓고 웃다가 그날 평창에서 숙소를 제공했던 친구 생각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먼저 떠난 그 친구의 경찰공무원 아들 덕분에 전국을 돌아다녀도 우리는 경찰 콘도에서 무료숙박 호강을 했다. 지금은 딸이 KT 다니는 다른 친구 덕에 지리산 연수원 이고, 또 사위가 LG화학에 다니는 친구 덕에 겨울이면 백암온천이다. 주중에는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니까 식사도 딱 우리들 입맛대로 아침에는 구수하게 누룽지까지 끓여 놓는다. 양쪽 회사들의 부모 위하는 사려에 늘 감사한다. 설악산 갈 때는 교사 딸 덕분에 호강하고 이제 걸림이 없는 할미들이다.
연말 모임에 앉아서 가장 인기 추억이 역시 쑥버무리다. 2위가 어룡골 우리 집에서 1박하던 날이다. 밤 10시 쯤 친구 둘이서 조곤조곤 하면서 밖으로 나가더니 애호박을 따와서 늦은 밤에 부추를 섞어 부침개 파티가 열렸다. 소화 시키고 자야 된다고 잠도 못 자게 했다. 다음날 세조길 가면서 주전부리가 필요하다고 또 부침개용 호박을 따러 뒷문을 열었다. 에구에구!! 잘생긴 것 골라 씨호박 하려고 똬리까지 받쳐 모신 자리에 똬리만 놓여있지 않은가. 호박은 엊저녁에 사라졌다. 그래도 세조길 한갓진데 둘러앉아 먹는 부침개 맛은 재미를 더해서 잊지 못한다. 해마다 호박 심었느냐 묻는다.
추억들만으로도 즐거운 할미들은 새해도 꼭 쑥버무리 여행 하자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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