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2월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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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2월이 좋다
  • 청라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4.02.0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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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를 맞이한 지도 어느덧 한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나는 중이다. 2월이 선장석에다 입춘을 앉혀놓고 귀빈석에다 우수를 모시고는 불쑥 찾아왔다. 홍유성죽 마음의 대나무를 완성하여 다시 한해의 단초를 재점검하는 구정도 도착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이 작심삼일이거나 오리무중이기를 반복하는 내게는 보너스 같은 연휴이다. 
  월력제정 기원에 의하면 2월은 7월, 8월에다 하루씩을 빼앗겨서 모자라는 달이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정기총회나 인사이동 등, 중요한 행사로 분주한 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잔인한 달이거나 겸손의 달이라고도 부른다지만, 내가 오래전부터 2월을 불러오던 호칭에는‘여백(餘白)의 달’이 있다. 혹독한 겨울의 강을 건너고서야 여백처럼 훈훈하고 여유롭게 만나는 달이기 때문이다. 욕심을 부리는 두 달에게 이틀을 기꺼이 내주고도 넉넉한 마음이 엿보인다. 올해는 윤년으로 금쪽같은 하루가 선물처럼 들어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아픈 이들의 시름이 풀꽃으로 피어나 희망의 노래가 되고, 불가지론자의 기도까지도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소통의 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퇴직 전에도 2월을 참 좋아했었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레던 학년말방학이 겨울방학보다 더 좋았었다. 옛날 어릴 적 소풍날보다도 전날의 기다림이 더 좋았듯이, 막상 결혼할 때보다 약혼시절이 더 좋았듯이, 기다림이란 언제나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게 하나 보다. 그래서 새 봄을 준비하는 우수 경칩의 절기가 그렇게도 좋았었다. 우주의 기가 활짝 열려서 지구와 사람의 관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알아차리는 시즌이기에, 얼어붙은 내 마음의 강물도 다시 출렁대는 2월을 어찌 노래하지 않을 수 있으랴 ~ 
  내가 2월을 칭하는 또 하나의 호칭에는‘정중동(靜中動)의 달’이 있다. 어두운 밤을 통과한 후에야 찬란한 태양이 쏟아지는 것처럼, 매서운 찬바람과 서릿발을 안고 침묵의 빙판을 건너와 도달한 달이기 때문이다. 곧 겨울의 적막을 깨고 산골짜기 흐르는 물소리도 들려오고, 광활한 대지를 적셔주는 봄비도 약수 같은 단맛으로 내릴 것이다. 자칫 은적이나 은둔을 상징할 수도 있겠으나, 겨울 수묵화에 걸려있던 한줄기 겨울바람도 마지막 매듭을 풀어내는 중이다. 비바람 폭풍우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소망의 언덕을 바라보게 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도연명이 꿈꾸었던 무릉도원의 세계로 이끄는 2월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2월처럼 나도 느닷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에게는 남모를 병명이 하나 있다. 지금 시대에 불치병이 아니면 별것 아니라고 간주해 버리겠지만, 몇 년에 한번씩 3박4일 단기수련을 시키면서 병원입원을 강요하는 병명이 있다. 그 작고도 못된 놈이 몸속 깊은 구석에 숨어서는 종종 인생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첫날부터 대뜸 들이대는 링겔 주입, 5끼 금식령으로 신체구속을 당한 후, 세상과 차단된 공간이라 그런지 밤낮으로 쏟아지는 잠과의 전쟁도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첫 죽을 뜨던 그 순간은 굶어보니 밥이 하늘이라는 걸, 물 한 방울이 생명수라는 걸, 잠시 잊었던 소소한 일상들이 행복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똑같은 입원과정을 마치고서 겨울 보리밭 앞에서 생기를 되찾았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한데~  다시 그 병실을 찾아가야 하는 2월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입원 기간이 좀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이참에 아예 근본 원인을 제거해 버립시다.’하던 선생님의 단호한 결정에 잠시 멍해지기는 하였으나, 조금은 침착하고 의연해진 자아를 들여다보며, 한주간의 인생수련도 착실하고 진하게 잘 수료하리라.’다짐해 본다.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하얀 구름을 싣고, 껴안아도 잡히지 않는 하늬바람을 타고 올 봄을 마중해야 하기에~ 아픈 기억들이나 덧나버린 통증까지도 말끔히 씻어줄 봄비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 그래도 2월은 참 좋은 달인가 보다. 다가오는 우수경칩은 가슴에 묻혀있던 시어의 종자를 파종하기에 또 얼마나 좋을 때이랴. ‘가슴마다 작란의 불씨를 피워내려는지, 흙속에 묻혔던 꽃씨의 혼이 깨어나려는지, 이파리 훨훨 털어버린 투명한 가지마다 생명의 몸짓 꿈틀거리며 흔들리누나! 산봉우리 잔설이 비릿한 물살로 흘러내리면 마지막 휘나레로 다녀간 눈꽃은 샛강이 되었겠지! 봄바람이 살풀이 한마당 풀어내며 경칩을 업으러 가는 우수(雨水)쯤에, 허공을 떠돌며 노니는 유성처럼, 자유의 대서사시 봄비처럼, 도화의 혼불을 만나고나 싶은 봄이 온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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