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대로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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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대로 살란다 
  • 오계자(보은예총 회장)
  • 승인 2024.01.1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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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내어 장거리 떠날 채비를 했는데 하얀 꽃송이가 온 세상을 무대삼아 여유미餘裕美를 지닌 춤사위를 벌인다. 일기예보가 오늘따라 잘 맞다. 엊그제 백내장 수술을 했지만 꼭 가야만 해서 나선 길인데 어쩔 수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된다. 대전 복합터미널에서는 토요일이라서 부산행 매진이다. 택시를 타고 대전역으로 가면서 딸에게 전화했다. 빨리 열차 좌석 알아보라고. 마침 ktx하나가 있단다. 무조건 예매하라고 했지만 15:20이면 두 시간 사십분을 기다려야 된다. 그나마 한자리 있는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카페의 한갓진 자리하나 잡으려고 들어갔더니 휴대폰에 빠져든 젊은이들로 빈자리가 없다. 다른 카페도 마찬가지다. 마침 일어나는 손님이 있어서 자리 잡았지만 4인 석에 혼자서 시간 보내는 건 아주 송곳방석이다. 우선 잔이나 비우려고 에스프레소 맛을 음미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중, “실례 쫌 하겠심더.” 하면서 또래로 보이는 할머니가 앞자리에 앉는다. 반가워서 “얼마든지 실례하소.” 했다. 
아재들처럼 통성명 없어도 할머니들은 주거니 받거니 수월하다. 어쩐지 낯설지 않음을 느끼던 참인데 “혹시 대구에서 여고?” 하더니 내 이름까지 기억하며 진한 미소를 띤다. 알고 보니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무용반에서 한국무용 하던 친구였다. 
국악을 전공하고 모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지금은 지역마다 발굴되지 않은 전통 민요를 찾아다닌단다. 해안지방은 거의 비슷하겠지만 나는 진도가 생각났다. “있잖아 나는 진도 아리랑이 매력 있어. 깊은 한이 서려서 뱃구레부터 짜 올리는 서러움에도 진도 여인들은 징징 거리지 않고 해학으로 풀어나가잖아. 그래서 좋아.” 듣고 있던 친구는 반가운 표정으로 “야야 니도 민요에 관심 있구나.” 하면서 가방을 뒤적이더니 usb 하나를 주면서 자신이 부른 배따라기 전곡이란다. “전곡이면 굉장히 긴 시간이잖아.?” 녹음실에서 쉬어가며 녹음 했단다. 
언젠가 연암 박지원의 저서에서 배를 떠나보낸다는 의미의 배따라기 노래에 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는 걸 생각하면 꽤나 오래된 민족의 한풀이 노래인 것 같다. 
해안 지역의 민요는 주로 바다에 남편 빼앗긴 여인들의 한이지만 배따라기는 흥얼거리는 뱃사람의 고달픈 생활이 서사체로 엮어져 있는 노래다. 이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해안지방에서 흔히 부르던 민요지만 지금은 평안도 배따라기만 남아있다고 한다. 
“나는 잦은 배따라기가 좋더라.” 했더니 “진도 아리랑과 잦은 배따라기를 좋아하는 건 너답다. 실은 살면서 우울해 질 때마다 오계자의 활기찬 모습을 상상하곤 했거든.” 하면서 여고 시절 씩씩하고 밝은 내 이미지가 잊히지 않더란다. “니가 워낙 내성적이라 그렇재.” 하며 웃었지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잦은 배따라기>는 풍어를 알리고 기쁨을 표현하는 빠른 박자의 남성적인 노래라고 한다. 지금도 내게 남성적 기질이 있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내 생각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마 어릴 적 다섯 오빠들과 일본식 집의 다다미방에서 덤부링도 하는가하면 막대 치기, 제기차기도 하며 남자처럼 자란 영향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성격자체가 남성적인 면이라고 스스로 평하고 싶다. 쪼잔한 것 싫고 실속 없이 앞장서서 해결사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오지라퍼’다. 혈액형, 고향, 집안 환경까지 모두가 나에게 남성적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싶다. 
60년 전 친구가 나를 기억한 것만으로도 반가운데 좋은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었다니 기분 좋은 날이다. 허나 혹여 나를 나쁜 기억 속에 묻어 둔 친구는 없을까. 또 내가 누군가의 좋지 않은 기억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곰곰이 더듬어보는 게기가 되었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이는 건 좋지 않지만 이렇게 가끔 돌아보는 것도 삶의 거울이 되는 것 같다. 뒷담이나 하면서 앞에서는 몸 사리는 짓거리가 싫어서 바른말 잘하는 성격이니 안티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이치는 안다. 그래도 앞뒤가 다른 일상은 싫으니 어쩌랴 살던 대로 살아야지 별수 없지 않은가. 60년을 잊지 않고 좋게 간직한 옛 벗도 있음을 알았으니 이젠 가벼운 마음으로 살던 대로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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