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항일 독립 운동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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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항일 독립 운동사 <4>
  • 보은신문
  • 승인 1991.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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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보은의 의로운 함성소리
수한면 묘서리편 (대정 8년 형 제338호)
단기 4252년(서기 1919년) 기미년 4월8일 밤에 내북면 서지리에서 항일 조선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나고 4월11일 밤에는 보은군 외속리면(당시는 탄부면) 구인리와 길상리에서 항일 만세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의 경찰은 초긴장 상태였을 것이다. 경비가 삼엄하고, 각반차림에다 긴 칼을 차고 센도보시를 쓴 경찰은 살기가 등등하였으리라.

그런데 4월12일 밤에 수한면 묘서리 농암산(등선바위)에서 또 만세 사건이 벌어졌으니, 당시의 주재소는 물론이고 경찰에서도 비상이 걸렸을 것은 가히 짐작이 간다. 당시에 최용문(崔容門), 안만순(安萬淳), 송덕빈(宋德彬·독립운동사 자료집의 宋德彬은 오기임)의사가 주동이 되어 농암산 정상에 60여명의 동민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였으니, 보은군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판결 사실과 이유를 밝히면, 「피고 3명은 공모하여 대정 8년 4월12일 오수 8시경 보은군 수한면 묘서리 농암산에서 동민 약 60명을 대동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열심히 고창(高唱)하며 불온한 연설로 동민들을 선동하여 모두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렀기 때문에 치안을 방해하였으므로 피고들의 자백에 의하며 보안 법 제7조에 의거, 징역형으로 처단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검사, 대정 8년 5월20일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 조선총독부 판사 김병하(金炳夏)가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최용문, 안만순, 송덕빈 피고는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부하여 당 지청 판결로 다음과 같은 주문(主文) 피고 용문(用門)은 징역 8개월, 피고 만순(萬淳), 덕빈(德彬)은 각 징역 6개월에 처함. 대정 8년 형 제338호」 군지에 의하면 이들 의사들은 위와 같은 판결을 받고서도, 최용문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 안만순·송덕빈 의사는 청주형무소에서 2년씩을 복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개는 형량보다는 형기가 짧게 마련인데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형량보다 더 장기간 복역시키는 등 압박을 자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만순 의사는 아들이 제1차 보국대에 끌려 가게 되자 아들 상근(相根)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요시찰인의 자식이라 일인의 보복을 받는다'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또한 송덕빈 의사는 거주지를 계속 옮겨다니며 살다가 본적을 회남년 거교에 두고서, 충남 대덕군 산내면 목달리 오지 마을 깊숙히 숨어살다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그들의 후손에 의해 전해진다. 후평리 물레방아골에서 살고있던 최용문의사와는 필자가 수한면사무소에 재직 당시, 1969년 3·1절 때 스테인레스식기 한벌이 나와서 전달하러 갔다가 대화를 나눌 기호가 있었다.

최용문 의사는 만세사건후 보은경찰서에서 조서를 받을 때, 각목을 오금에 넣은 채 꿇어앉게 하고는 허벅지를 밟는 고문과, 말의 가죽을 여러겹으로 꼬은 새끼줄 같은 몽둥이를 물에 담가두었다가 못을 벗기고 양손을 뒤고 결박한 채로 그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 대나무를 이쑤시게 처럼 만들어 손톱·발톱 밑을 찌르는 고문은 생각만 하여도 등골에 땀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루자들이 많이 소환된 날 경찰서 조사실에서 악에 바친 연루자들이 죽기살기로 또만세를 부르자, 당황한 경찰이 죄가 가벼운 자들을 귀가조치 시킨 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더욱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최용문 의사의 노안에는 눈물이 어렸었던 걸로 기억된다. 지면관계로 구구절절히 기록할 수는 없으나, 그 때에 고문을 가하던 순사가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었으며, 청주 검찰청에서 조서를 받던 조사관도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보는 앞에서 조선인 형사는 더 가혹하게 고문을 했다면서 최의사는 그들이 해방된 후 또 순경이나 형사가 되어가지고 애국애족을 논하는 꼴은 차마 못 볼 것이라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그렇게도 가혹한 고문을 하던 왜놈들의 충견이 해방이 되자 한치의 반성도 없이 애국애족을 한다며 고위직에서 근무하는 꼴을 보면, 이 사회는 바르고 옳은 사회가 되지 못하고 언젠가는 도적놈 천지가 되고 말것이라고 말하면서, 권력에 아부해서 일본놈의 젖을 빨다가 해방이 되니까 한국의 녹을 먹으며 살아도 무방하다면 이는 큰 불의를 묵인하고 그들에게 봉급을 주는 형편이니, 정의와 도덕이 벗는 사회요, 시류를 보아 권세에 아부하고 아첨 잘하는 쓰레기를 기르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고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한, 만약 일본이라면…… 그들의 입장이 바뀌어서 조선이 일본을 강점하여 그들을 우리가 식민지로 지배했었다가 해방이 되었다면…… 그들은 조선의 앞잡이였던 자들은 물론이고 그 3대까지 멸족시켰을 것이라고 말해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소양과 정신은 부러워하는 마음을 표했다. 일제치하에서 일제의 의해 앞잡이로 이용돈 사람들은 융숭하게 대접받고 봉급도 받아 땅도 많이 사고 집도 사서 잘살며 자식들고 공부시켜 출세시키는 등 영화를 누릴 적에, 내 나리와 내 민족을 위해 갖은 고문을 겪으며 항일하던 사람들은 요시찰인이 되어서 고생하다가 해방이 되어 내나라는 찾았으되 친일분자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친일 분자들을 또 공직자로 채용하여 국록을 주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 면서, 훗날 이 꼴을 본 후손들에게 의해 이기심과 욕심만 가득한 한탕주의가 팽배한 사회가 올 것이 두렵다고 말하며 탄식하던 그분의 모습이 두고두고 생생하다.

의롭게 살고, 오직 조국광복과 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생사불구 하였으나, 그들 항일의사들은 경제적인 궁핍으로 가솔을 알뜰히 보살피지 못하였으니, 그래서 그 후손들이 고향을 등진 경우가 허다하다. 윤정훈 의사의 가족에게는 다행히도 보훈처에서 약간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있으나, 그 외 9명의 의사들의 후손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진실로 애국애족을 몸소 실천한 우리고장의 애국 항일의사와 그 유족들에게 어째서 아무런 혜택도 주지않고 광복이후 46년간을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가는 일이다. 필자가 찾은 항일의사들의 초라한 무덤에는 눈만 하얗게 쌓여 있고, 어느곳에는 정초에 후손이 성묘를 다녀갔는지 두손모아 무릎을 굽히고 절을 한 자국이 눈에 띄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허전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1991년 신미년 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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